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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DJ-노정부 반면교사 10년




DJ-노정부 반면교사 10년 <1> 거꾸로간 국민통합


지난해 6월 광주에서 열린 ‘2006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 정상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는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자칭 ‘진보 정부’였다. 하지만 국민적 공감대 없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하고 한국의 주류(主流) 세력을 ‘청산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무리한 편 가르기와 이념적인 정책실험으로 혼선과 갈등을 초래한 끝에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DJ ‘우리끼리’ 盧 ‘편가르기’… 소외된 국민 피멍

두 정부는 대선 승리에 대해 각각 ‘50년 만의 정권 교체’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며 자신감이 확신으로, 결국은 맹신이라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자기만족)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표방했던 ‘국민통합’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지적도 많다.
‘이명박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의 그림자와 후유증을 분야별로 점검해 본다.

○ ‘우리끼리’가 부른 새로운 편향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때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외자 유치와 대외신인도 상승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를 비교적 단기간 내 봉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 상황이 안정국면에 접어들자 점차 ‘과욕(過慾)’을 부렸다는 분석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1998년 10월 발족된 대통령자문기구인 ‘제2건국위원회’다.
공무원과 정권 주변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관변단체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제2건국위’는 이른바 ‘개혁의제 개발’과 ‘의식 개조’를 앞세운 국민운동을 표방했다. 그러나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관 주도형 운동 방식을 택했고 ‘주류 교체’를 위한 정치적 음모라는 비판도 받았다.
정치 중립성을 지키며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해야 할 국가정보원에서 1999년 5월 천용택 원장 취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특정 지역 편중 인사 논란이 야기된 것도 지역갈등의 심화로 이어졌다.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낸 국회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시절 호남 출신 인사들의 요직 점유 비율은 35.7%로, 서울 경기와 영남 출신 전체를 합친 수준(35.6%)을 넘어섰다.
정권 핵심부는 입만 열면 ‘과거 50년 동안 잘못됐던 것을 바로잡는 과도기적 과정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편향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편향을 야기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이 임기 중반 이후 대북 문제를 계기로 틀어진 것도 대북 정책을 ‘햇볕’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묶어 놓고, ‘다른 목소리’는 ‘반(反)민족’ ‘반통일’로 몰아간 정권 핵심부의 독선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시스템 정치는 멀어지고, 동교동계 가신 그룹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강해졌다. 남북 정상회담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도한 언론사들이 주된 타격 대상이 된 세무조사와 공정위 조사도 집요하게 계속됐다. 요컨대 국내 정치에서는 ‘우리끼리’, 대북 문제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노선이 국민 내부의 골을 깊게 했다는 지적을 낳았다.

○ 민심과 멀어진 ‘개혁 코드’ 편 가르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반부터 능력보다는 이념적 ‘코드’를 통해 주류세력 교체를 시도했다. 각종 엘리트 집단에 대한 조롱과 역사에 대한 부정적 공격적 언급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을 낳았다.
대통령직인수위에 합류한 26명의 인수위원 중 절반을 좌파 성향 학자들로 채우고 실무는 국정운영 경험이 부족한 386 정치인들과 권력 주변의 시민단체 인사들에게 맡겼다. 초기 청와대 인사도 ‘386 개혁 코드 공유’가 최우선 조건이었다.
2004년 4·15총선 후 청와대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 만찬에서는 386 초선 의원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국가기관 장악을 일종의 ‘해방구 쟁취’로 보고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노무현 정부는 방송과 친여 매체들을 이용해 동아 조선 등 중도보수 성향 매체들을 일관되게 ‘적’으로 여기며 공격했다.
집권 초기 사립학교법 제정에 의욕을 보일 때는 사학을 보유한 종교계를 ‘사익(私益)에만 몰두한 집단’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 원로들의 고언(苦言)도 수구 보수세력의 한마디쯤으로 치부했다.
집권층이 사법부 삼성 서울대 강남 보수언론 등을 ‘5적(敵)’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말도 공공연히 확산됐다. 집권층의 기존 엘리트 배척 때문에 과거 중도보수적 정책관을 가졌던 인사조차 정부와 국회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무현 코드’에 맞춰 가는 현상도 나타났다. 재정경제부 장관에 이어 교육부총리를 지낸 대통합민주신당 김진표 의원도 그런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가 민생과는 유리된 이상주의와 탁상공론으로 ‘개혁 피로감’을 야기한 것도 결국 편향된 코드인사의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실제로 좌파 정책을 수용한 것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집권 초기부터 말과 행동에서 지나치게 좌파적 이미지를 풍겼다. 이념과 코드에의 집착으로 성과도 명분도 모두 상실한 정권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입력2007.12.29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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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2>독선이 부른 국론분열


2003년 대북 비밀송금 재판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지만 무리한 대북정책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주도했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측에 비밀리에 돈을 준 혐의로 2003년 7월 대북송금 의혹사건 제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여론에 귀막고 ‘밀어붙이기’… 햇볕도 개혁도 꼬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햇볕정책’과 ‘코드 입법’은 성역이었다. 정권 내부에서 그 정당성이나 실효성에 관한 논의가 금기시되었음은 물론이고 정권 밖의 비판에 대해서는 ‘수구’ ‘꼴통’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침묵을 강요했다.
항상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대통령, 출세를 위해 맹목적 충성을 다하는 정부 고위직과 관변 학자들, 비판세력에 대해 저주와 조롱을 퍼부으며 정권과 공생한 여당과 친여 매체, 관변 시민단체들이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좌파적 정책을 독선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소수 집권세력에 의한 국민 다수의 소외와 함께 정책의 오류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시스템의 마비로 이어졌다.

○ 독선적 햇볕정책 밀어붙여 남남 갈등 심화

2004년 총선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열린우리당이 이른바 4대 법인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신문법, 과거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고 해 이를 저지하려는 한나라당과 마찰을 빚었다. 2004년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당시 열린우리당 최재천 간사가 국가보안법 폐지안 및 형법 개정안 상정을 시도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몸으로 막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정부가 ‘퍼주기’ 논란 속에 속도와 성과에 대한 논란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대북 햇볕정책은 극심한 ‘남남 갈등’을 초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산적한 국내 현안을 제쳐 놓다시피 하면서 햇볕정책에 ‘올인’(모든 것을 기울임)하는 것을 놓고 그 배경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김 전 대통령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추진과정의 논란을 뒤로한 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퇴임 후인 2003년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정상회담 직전 4억5000만 달러를 북측에 비밀 송금한 ‘대북 뒷거래’가 드러남으로써 노벨상의 빛이 바랬다.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 조항도 내부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초헌법적 합의로 북측의 대남전술에 말려든 것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독선적 정책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거세질수록 수적 우위를 통해 이를 제압하려는 김 전 대통령의 집착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노선과 이념을 무시한 지역연합으로 출발했던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은 결국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집행에 앞장섰던 김 대통령의 측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처리에 자민련이 동조함으로써 결별에 이르렀다.
또 1997년 12월 대선 당시 국민회의(77명)와 자민련(43명)의 의석이 2년 뒤인 1999년 12월 말 국민회의 103명, 자민련 55명으로 합쳐서 과반수에 이르렀다. 여소야대를 무리하게 여대야소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 뒷거래설’이 만연했고 대야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야당을 ‘대등한 협상 파트너’라기보다는 ‘설복시켜야 할 대상’ 정도로 간주하는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지적이다.

○ 오만이 불러 온 ‘코드 정책’ 소용돌이

경찰은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12일 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내 기사송고실을 기습적으로 폐쇄했다. 출입기자들이 13일 이택순 청장과의 면담을 요구하자 의경들이 접근을 막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풍’에 힘입어 예상치 않던 과반 의석을 차지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기세등등했다.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했다”고 자랑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곧 ‘기득권층 개혁’을 겨냥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추진을 전면에 내세웠고, 나라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언론계와 교육계 등의 비판론을 봉쇄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지만 ‘참여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은 이념 대결만 극대화시켰고, 신문법은 2005년 국회를 통과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많은 독소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무리를 거듭해 개정한 사립학교법은 2년여에 걸쳐 극심한 논란을 일으켰고, 17대 대선을 앞두고 종교계의 표를 의식한 대통합민주신당에 의해 사실상 원상복구됐다. 과거사법 역시 지금까지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이나 부동산 정책, 국가정체성을 무시한 대한민국사에 대한 독선적 역사관의 강요 등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퍼주기식 대북정책과 북한 감싸기, 저자세 대북정책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대선을 2개월여 앞둔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나, 북한 핵 폐기 약속과 국군포로 등의 해결 없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경제지원 약속만 했다는 비판이 무성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모두 민주투사라는 강한 신념으로 인해 조정 타협 합의 양보보다는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며 “본인들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신념의 발로겠지만 그들을 주류로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독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코드나 뜻에 맞는 사람들과만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정상적인 시스템 작동이 결여됐고 다양한 의견 포용이 불가능해지면서 정치적인 양극화가 생겼다”고 비판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지지를 못 받은 것은 국민의 실질적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것과 독선적인 자세 때문인데 그 원인 진단을 제대로 못했다. 국민 지지 상실을 언론, 특히 보수 신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적대시했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DJ땐 ‘의원 꿔주기’… 盧정부땐 ‘당적 세탁’


정당 민주주의가 웃음거리로
민주개혁세력을 자처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체제의 중요한 축인 정당정치의 측면에서는 역설적으로 비(非)민주적인 구태를 답습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의원 꿔 주기’라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됐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공조를 통해 공동정권을 창출한 자민련이 17석 밖에 얻지 못해 원내 교섭단체(20석 이상)가 되지 못하자 그해 12월 30일 민주당은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장재식 의원이 뒤를 이었다.
‘자민련 교섭단체 만들어 주기’를 위한 이들 의원의 당적변경 사태는 결과적으로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마치 ‘물건’처럼 정당 간에 서로 주고받은 모습이 됐다.
이런 ‘의원 빌려 주기’는 정당과 의회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헌정왜곡 사례이며 ‘정당정치의 희화화(戱畵化)’라는 비판이 거셌다. 당시 민주당 지도부는 “정국 안정을 위한 살신성인이자 고육책”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송석찬 의원은 이후 2003년 본보 인터뷰에서 “정치사를 굴절시킨 나 같은 정치인은 앞으로 나오지 않기를 빈다. 나는 뒤늦게 내 행동이 국민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정당정치 파괴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탄핵 국면에 힘입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은 올해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대선을 치렀다.
원내 제1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민주당 탈당파, 시민사회단체, 손학규 전 경기지사 그룹 등 7개의 비동질적 정치세력들이 모여 대선 4개월을 앞두고 창당한 ‘대선용 정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20여 명은 당적을 6개월 새에 4차례(17대 국회 전체로는 5차례)나 바꾸기도 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정치에서는 찾아보기가 극히 드문 사례였다.
현 정부 및 자신들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성과 이를 통한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수구냉전보수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가치와 정책노선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대선용 ‘짝짓기’에 골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당은 일정 기간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 대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현 정부의 사실상 집권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고질적인 돈 선거 풍조와 정경유착이 상당 부분 사라진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또 권위주의 타파와 특권 폐지에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는 긍정론도 있으나, 지켜져야 할 권위를 상실한 채 무질서와 국격(國格)의 추락을 초래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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