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젊은이들 ‘복지천국’ 떠난다
일자리 찾아 이웃 노르웨이로
덴마크 고급인력 유출도 심각
최근 스웨덴 경제가 침체되면서 스웨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웃나라인 노르웨이로 가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12월 30일 보도했다.
스웨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성장을 구가하면서 한때 노르웨이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북유럽의 선두주자였다. 경제성장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는 ‘스웨덴 복지 모델’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스웨덴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노르웨이는 1970년대 발견된 북해 유전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계속하면서 두 국가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스웨덴의 80% 선에 불과했던 노르웨이는 1991년을 기점으로 스웨덴을 따라잡았다. 2006년 물가를 반영한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노르웨이가 5만3000달러로 스웨덴의 3만4000달러를 큰 폭으로 앞서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기준으로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일하는 스웨덴인은 3만5000명 안팎으로 1990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 이 중 상당수가 18∼25세의 젊은이들이다. 또 스웨덴에서 살면서 노르웨이로 출근하는 스웨덴인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스웨덴인들이 노르웨이에서 주로 종사하는 업종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꺼리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힘든 일은 대개 시간당 임금이 22∼46달러로 스웨덴의 두 배 수준이어서 스웨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한편 덴마크는 높은 세금 때문에 고급 인력을 중심으로 인력유출 현상을 겪고 있어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12월 26일 보도했다.
덴마크는 그동안 유럽식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노동시장에서만큼은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해 2006년에도 경제가 3.5% 성장하는 등 유럽 기준으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연간소득이 7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자에 대해서는 63%의 세율을 적용하면서 고급 인력들의 덴마크 탈출이 가시화하고 있다. 덴마크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05년에만 덴마크인 1만9000여 명이 세금이 낮은 영국 런던 등 다른 지역으로 옮아갔다.
유능한 덴마크 고급 인력들은 영어구사능력 등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좋은 직장을 잡는 데 별다른 애로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우수 인력들의 덴마크 탈출이 이처럼 가속화하면 2009년부터는 덴마크 경제성장률이 1%를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대선 직후에 서둘러 할 일들
대선 직후에 서둘러 할 일들
창비주간논평. 2007-12-31 오후 9:43:22 Comments (0)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창비주간논평의 애독자 여러분, 과세 잘 하셨는지요? 무자년(戊子年) 새해 첫 주간논평을 쓰면서 창비 편집진을 대표하여 인사 올립니다. 새해에 모두들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앞날을 내다보며 할 일을 다짐하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는 지난 연말에 대선을 치르고 난 참입니다. 대통령선거는 해가 바뀌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국면전환의 계기가 되지요. 당선자가 드디어 확정될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특정 후보의 이해관계를 위한 것으로 오해받을 부담감도 사라집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일감을 새로이 챙겨볼 대목입니다.내년 4월의 국회의원 총선거가 다가오는 점이 여전히 걸리기는 합니다. 이번에는 총선전략과 연계되거나 연계되는 것으로 보이는 부담이 안겨지니까요. 이것도 현실의 일부로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무튼 지금 우리 사회가 서둘러 해야 할 일 몇가지를 꼽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믿습니다.새해를 맞아 당면과제나 열거하기보다 좀더 원대한 계획을 펼쳐 보여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실은 대선 직후야말로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근본적인 반성을 하고 장기적인 구상을 할 때입니다. 저 자신 그런 차원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이 글도 그 산물의 하나입니다. 다만 원래 우리 지식인사회가 현실과 동떨어진 '원대한' 담론으로 넘쳐나거니와, 요즘은 '근본적 반성'의 이름으로 시민들의 실천의지를 마비시키는 언설도 수두룩합니다. 그날그날의 사업을 통해 긴 안목을 길러가면서 중·장기적 기획을 갖고 단기적 과제를 선정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서둘러야 할 첫번째 과제는 당선자의 선거공약에 대한 철저한 점검입니다. 당선자측에서도 정권인수 과정에서 점검을 하겠지만, 인수위원회와 관료사회에만 맡길 일은 아닙니다.예컨대 세칭 '한반도 대운하', 즉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경부대운하 계획이 있지요. 원래는 이명박 후보의 대표공약이었는데 워낙 문제가 많은 구상인지라 선거운동 중에는 후보진영 스스로가 논의를 자제하는 기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인 추진 의지를 밝히고 있는만큼 검증이 시급해졌습니다. 참여정부의 건설교통부는 이 사업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평가를 냈었지만, 인수위 또는 새 정부의 재검토 지시를 받아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관료사회의 속성이 그렇기도 하려니와, 이런 식의 거대 토목공사야말로 건교부의 체질에 딱 맞는 것이기도 하니까요.전문지식을 요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섣부른 판단을 아끼려고 합니다. 그러나 추진자들이 장담하는 결과 가운데서 공사기간 중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약속만은 어느정도 이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은 바로 그래서 더 걱정이지요.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렇고 이명박 후보가 비판했던 행정도시 건설사업이 그렇듯이, 이런 사업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일단 저질러놓으면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끝난 뒤에 어떤 결과가 될지에 아랑곳 않고 공사의 지속에 목을 매는 기득권층이 형성되는 것이지요.이 문제는 4월 총선의 직접적인 쟁점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부운하 추진세력이 대선 압승에 이어 총선에서도 승리한다면 두 차례나 국민검증을 받았다면서 거침없이 밀고 나가기 쉽습니다. 범국민적 검증작업을 하루빨리 시작해서 만약에 문제점이 많다면 정권 스스로가 재고를 약속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노무현정부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서두를 일은 아니지만 시작은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무척 미묘한 과제이긴 하지요. 지난 대선이 노정권에 대한 국민의 냉혹한 심판이었다는 점에 대부분의 논자들이 동의하고 있는만큼 참여정부의 과오를 열거하는 일이야 크게 부담될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잘한 일도 이제는 객관적으로 평가하자고 한다면 보수언론과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개혁세력의 일부조차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고 집중포화를 퍼붓기 쉽지요. (구)여권 또한 선거전략상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는 그쪽에 맡겨두더라도, 적어도 시민사회, 지식인사회는 이제 좀더 정교하고 엄밀한 인식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대선에서 내려진 국민의 심판은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작년의 5·31지방선거 직후에 제가 창비주간논평에 썼듯이 “큰 흐름에 대해 한가지 굵직한 판단이 필요해졌을 때 그 판단을 내려주는 것이 민심”입니다.(<곱셈의 정치는 가능할까>) 이 범박한 판단을 두고 좀더 정밀한 해석과 구체적인 후속수단을 강구하는 일은 정치가의 몫이요 지식인의 몫이며 깨어있는 시민들의 몫인 것입니다.그런데 마침 총선도 닥치고 하니까 '노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당선자 자신은 오히려 돈 안 드는 선거풍토 확립 등 지난 정권의 성과를 인정하고 계승을 다짐하는데 말이지요.물론 당선자가 동의하는 업적이라 해서 반드시 긍정할 것은 아닙니다. 한미FTA 졸속체결이 바로 그런 예지요. 미국 의회가 아직 비준을 안했고 우리 쪽에서도 제대로 심의조차 못했는데 2월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처리하자고 노 대통령과 이 당선자가 합의한 것은 비판해 마땅합니다.당선자측이 아직도 흔쾌히 인정 않는 노정권의 성과로는 햇볕정책을 계승해서 상당정도 발전시킨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머뭇거리거나 에둘러 올 때도 많았고 지나치게 서두른 일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한미간 공조와 6자회담에서의 자기 역할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화해를 이만큼 진전시켜온 공로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남북관계 진전의 선행조건으로 삼는 것이 당선자의 확고한 방침이라면—다행히 그 점이 아주 확고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이 대목에서는 노정권의 정책이 분명히 더 낫다는 평가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극히 단기적인 과제가 특검수사를 공명정대하게 수행하는 일입니다. 특검은 삼성특검과 이른바 이명박특검 두 가지가 걸려 있는데, 후자야말로 정치적으로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지요. 원래 특검을 추진했던 사람들조차 혹시나 '국민의 심판'을 외면하고 기왕에 뽑아놓은 대통령을 흔들기부터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망설일 정도로 부담스러운 사안이기도 합니다.그러나 혐의의 중심에 선 후보가 큰 표차로 당선되었으니 특검법안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리에도 안 맞고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다행히 거부권은 행사되지 않았고, 당선자도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누가 이겼건 졌건, 표차가 크건 작건, 법적인 절차는 예정대로 밟는 것이 법치주의요 선진화의 바른 길입니다. 아니,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후보자를 인정하고 가급적 좋은 대통령이 되게끔 도와주는 것이 민주시민의 의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거에서 확실히 이기기만 하면 모든 법적인 문제가 해소된다는 주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미 폐기된 학설과도 통하는 발상이 아니겠습니까. 쿠데타가 아니어도 부정선거나 관권선거라면 당연히 규탄해야겠지요. 물론 이번 대선은 비교적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였고 투·개표 과정도 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보자의 기본적 자격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가 검찰권에 의해 봉쇄되고 왜곡되었다는 국민적 의혹이 특검 도입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선 승리를 이유로 의혹 규명작업을 중단한다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관권개입이 될 것입니다.불행하게도 이 사안은 너무나 극과 극의 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적당한 타협'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혐의내용이 정치인들의 통상적인 거짓말을 훨씬 넘어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반면, 검찰은 깨끗한 무혐의 판정을 내려주었고 당사자는 자신의 BBK 창립을 자랑하는 육성 동영상이 공개된 뒤에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음'을 거듭 주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세부적인 사실이 어떻게 밝혀지건 문제가 심각하다는 판단 아래 선거과정에서 분명한 의견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저의 시민적 양식을 따랐을 뿐 아니라 전문가의 문제제기(조영선
2007년 12월 30일 일요일
Family 대화가 필요해!
해도해도 너무 무심한 가족 [중앙일보]
개그콘서트 ‘대화가 필요해’로 돌아본 2007
관련링크
[Section] family
올 한 해 우리 가족은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을까. 서로 일이 바쁘다고, 생활에 피곤하다고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피하진 않았을까.
우리 가족의 모습이 ‘대화가 필요해’와 같진 않았을까.
KBS-2TV ‘개그 콘서트’의 ‘대화가 필요해’.
대화가 거의 없는 우리 시대의 가족상을 과장하며 쌉쌀한 웃음을 안긴다.
고교생 아들 역의 장동민, 엄마 신봉선, 아빠 김대희(왼쪽부터).
‘대화가 필요해’는 KBS-2TV ‘개그 콘서트’의 인기 코너다. 프로그램에는 세 명의 개그맨이 등장한다. 엄마와 아빠,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한 가족이다. 저녁 식탁에서 이 경상도 가족은 아빠의 ‘밥묵자’는 말에 따라 무표정하게, 묵묵히 밥을 먹으며 몇 마디 나누기 시작한다.
아빠:“동민(아들)이는 해 뜨기 전에 기 나가 저녁 먹을 때나 돼서 기 들어오고, 대체 뭐하고 다니노?”
엄마: “지도 모르겠심더.” 그때 아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아빠: “니 오늘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뭐 했노?”
아들: “학교 갔다 왔는데예.” 머쓱해진 아빠가 다시 묻는다.
아빠: “아직 졸업 안 했나?”
아들: “지 올해 입학했심더.”
서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가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희화화한 이 코너는 1년 넘게 인기를 끌며 장수하고 있다. 시청자 게시판엔 ‘우리 가족 같다’는 평도 많다. 3명의 출연진(김대희·신봉선·장동민)이 꼽은 ‘명장면, 명대사’를 통해 올해 우리 가족의 모습을 돌아봤다. 김대희(33)는 “웃기기 위해 상황을 극단적으로 과장했지만 우리 스스로도 반성하며 코너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장동민(28)은 “평소 생활이 반영돼 있다”고 했고, 신봉선(27)은 “코너가 인기를 끄는 걸 보니 ‘대화 없는 가족’이 많긴 많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들이 꼽은 인상 깊은 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다. 2007년의 마지막 날을 웃음과 반성으로 꾸며보자.
엄마:어머님 아버님, 제주도 여행 보내드립시더. 지가 반찬값 아끼가 돈 모았심더.
아빠:제주도 사신다.
시댁·친정 본가·처가의 부모님께 얼마나 연락이 없었으면 이럴 수 있을까. 부모가 어디 사는지 모를 사람은 없겠지만 떨어져 사는 부모님의 근황을 얼마나 잘 알고 있겠나. 보일러 광고를 보면서 부모님의 잠자리가 따뜻한지 아닌지 걱정하면 다행이다. 연례행사 정도로 부모님 얼굴을 본다는 친구들 얘기에 많이 놀랐다. 전화라도 자주 해야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다. 정말 대화가 필요한 사이다.
아빠:(곱슬머리 엄마를 보고) 니 또 파마했나.
엄마:지 원래 꼽실임미더.
변화에 무관심했던 것, 서로의 일상에 관심 가지는 것조차 귀찮아 하지 않았나.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라고, 매일 아침에 보는 가족이라고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다 보면 서로에게 소홀해지기 쉽다. 애정 어린 눈길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서로의 사소한 변화를 눈치 채기 힘들다. 그렇지만 가족의 관심은 힘들 때 더욱 소중한 법이다. ‘누군가 내 옆에서 날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작은 변화도 알아봐 주는 가족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느껴진다.
아빠:생활비 좀 아껴써라 안 했나. (한 쪽을 가리키며) 저 쌓아 놓은 박스들… 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거 아이가. 좀 애끼라.
엄마:낼 우리 이사 갑니더.
아빠:이 집을 팔았다꼬? 당신은 가장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당신 맘대로 집을 파나?
엄마:집주인이 나가랍니더.
한집에서 살지만 각자의 생활은 따로 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모두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남편의 하루 일이 궁금하다. 남편도 집에는 별일 없었는지 묻는다. 하지만 서로 말하기를 꺼린다. 귀찮아서다. ‘괜히 걱정할까봐’라는 핑계도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얘길 털어놓을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도 부모와 대화를 피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으면 대화는 늘 어렵다. 이해 없는 대화가 오해로 이어져 별것 아닌 일로 가족들과 언쟁을 벌인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엄마:느그 아빠는 일요일인데 집에 쫌 있지 어데 가셔서 저녁때도 안 오시노?
아들:그러게 말입니더. (뒤늦게 아빠 등장해)
아빠:내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방에.
평범한 가정의 풍경이다. 각자 방에 틀어박혀 휴일을 보낸다. 그나마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다행인 정도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부모들의 상실감이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이라 서로 너무 익숙해서 이런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정말 이런 상황이 올까 봐 걱정이다.
(전화벨 소리 울리고 아들이 귀찮은 듯 전화를 받는다)
아들:그런 사람 없다니까 왜 자꾸 그러십니꺼?
아빠:누굴 찾노?
아들:김대희라고예.
아빠:내가 김대희다. 김! 대! 흐! 이!
학교 시험에 ‘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쓰라’는 것이 문제로 나와도 정답을 아는 사람이 몇 없다고 한다. 명문대생도 별로 다르지 않다더라. 부모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친척들 이름은 알고 있을까. 조부모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 가족이 점점 단출해 지는데
친척들도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카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정말 황당하다.
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개그콘서트 ‘대화가 필요해’로 돌아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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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family
올 한 해 우리 가족은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을까. 서로 일이 바쁘다고, 생활에 피곤하다고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피하진 않았을까.
우리 가족의 모습이 ‘대화가 필요해’와 같진 않았을까.
KBS-2TV ‘개그 콘서트’의 ‘대화가 필요해’.
대화가 거의 없는 우리 시대의 가족상을 과장하며 쌉쌀한 웃음을 안긴다.
고교생 아들 역의 장동민, 엄마 신봉선, 아빠 김대희(왼쪽부터).
‘대화가 필요해’는 KBS-2TV ‘개그 콘서트’의 인기 코너다. 프로그램에는 세 명의 개그맨이 등장한다. 엄마와 아빠,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한 가족이다. 저녁 식탁에서 이 경상도 가족은 아빠의 ‘밥묵자’는 말에 따라 무표정하게, 묵묵히 밥을 먹으며 몇 마디 나누기 시작한다.
아빠:“동민(아들)이는 해 뜨기 전에 기 나가 저녁 먹을 때나 돼서 기 들어오고, 대체 뭐하고 다니노?”
엄마: “지도 모르겠심더.” 그때 아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아빠: “니 오늘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뭐 했노?”
아들: “학교 갔다 왔는데예.” 머쓱해진 아빠가 다시 묻는다.
아빠: “아직 졸업 안 했나?”
아들: “지 올해 입학했심더.”
서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가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희화화한 이 코너는 1년 넘게 인기를 끌며 장수하고 있다. 시청자 게시판엔 ‘우리 가족 같다’는 평도 많다. 3명의 출연진(김대희·신봉선·장동민)이 꼽은 ‘명장면, 명대사’를 통해 올해 우리 가족의 모습을 돌아봤다. 김대희(33)는 “웃기기 위해 상황을 극단적으로 과장했지만 우리 스스로도 반성하며 코너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장동민(28)은 “평소 생활이 반영돼 있다”고 했고, 신봉선(27)은 “코너가 인기를 끄는 걸 보니 ‘대화 없는 가족’이 많긴 많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들이 꼽은 인상 깊은 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다. 2007년의 마지막 날을 웃음과 반성으로 꾸며보자.
엄마:어머님 아버님, 제주도 여행 보내드립시더. 지가 반찬값 아끼가 돈 모았심더.
아빠:제주도 사신다.
시댁·친정 본가·처가의 부모님께 얼마나 연락이 없었으면 이럴 수 있을까. 부모가 어디 사는지 모를 사람은 없겠지만 떨어져 사는 부모님의 근황을 얼마나 잘 알고 있겠나. 보일러 광고를 보면서 부모님의 잠자리가 따뜻한지 아닌지 걱정하면 다행이다. 연례행사 정도로 부모님 얼굴을 본다는 친구들 얘기에 많이 놀랐다. 전화라도 자주 해야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다. 정말 대화가 필요한 사이다.
아빠:(곱슬머리 엄마를 보고) 니 또 파마했나.
엄마:지 원래 꼽실임미더.
변화에 무관심했던 것, 서로의 일상에 관심 가지는 것조차 귀찮아 하지 않았나.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라고, 매일 아침에 보는 가족이라고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다 보면 서로에게 소홀해지기 쉽다. 애정 어린 눈길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서로의 사소한 변화를 눈치 채기 힘들다. 그렇지만 가족의 관심은 힘들 때 더욱 소중한 법이다. ‘누군가 내 옆에서 날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작은 변화도 알아봐 주는 가족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느껴진다.
아빠:생활비 좀 아껴써라 안 했나. (한 쪽을 가리키며) 저 쌓아 놓은 박스들… 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거 아이가. 좀 애끼라.
엄마:낼 우리 이사 갑니더.
아빠:이 집을 팔았다꼬? 당신은 가장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당신 맘대로 집을 파나?
엄마:집주인이 나가랍니더.
한집에서 살지만 각자의 생활은 따로 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모두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남편의 하루 일이 궁금하다. 남편도 집에는 별일 없었는지 묻는다. 하지만 서로 말하기를 꺼린다. 귀찮아서다. ‘괜히 걱정할까봐’라는 핑계도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얘길 털어놓을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도 부모와 대화를 피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으면 대화는 늘 어렵다. 이해 없는 대화가 오해로 이어져 별것 아닌 일로 가족들과 언쟁을 벌인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엄마:느그 아빠는 일요일인데 집에 쫌 있지 어데 가셔서 저녁때도 안 오시노?
아들:그러게 말입니더. (뒤늦게 아빠 등장해)
아빠:내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방에.
평범한 가정의 풍경이다. 각자 방에 틀어박혀 휴일을 보낸다. 그나마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다행인 정도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부모들의 상실감이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이라 서로 너무 익숙해서 이런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정말 이런 상황이 올까 봐 걱정이다.
(전화벨 소리 울리고 아들이 귀찮은 듯 전화를 받는다)
아들:그런 사람 없다니까 왜 자꾸 그러십니꺼?
아빠:누굴 찾노?
아들:김대희라고예.
아빠:내가 김대희다. 김! 대! 흐! 이!
학교 시험에 ‘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쓰라’는 것이 문제로 나와도 정답을 아는 사람이 몇 없다고 한다. 명문대생도 별로 다르지 않다더라. 부모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친척들 이름은 알고 있을까. 조부모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 가족이 점점 단출해 지는데
친척들도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카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정말 황당하다.
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DJ-노정부 반면교사 10년



DJ-노정부 반면교사 10년 <1> 거꾸로간 국민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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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광주에서 열린 ‘2006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 정상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는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자칭 ‘진보 정부’였다. 하지만 국민적 공감대 없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하고 한국의 주류(主流) 세력을 ‘청산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무리한 편 가르기와 이념적인 정책실험으로 혼선과 갈등을 초래한 끝에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DJ ‘우리끼리’ 盧 ‘편가르기’… 소외된 국민 피멍
두 정부는 대선 승리에 대해 각각 ‘50년 만의 정권 교체’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며 자신감이 확신으로, 결국은 맹신이라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자기만족)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표방했던 ‘국민통합’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지적도 많다.
‘이명박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의 그림자와 후유증을 분야별로 점검해 본다.
○ ‘우리끼리’가 부른 새로운 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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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광주에서 열린 ‘2006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 정상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는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자칭 ‘진보 정부’였다. 하지만 국민적 공감대 없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하고 한국의 주류(主流) 세력을 ‘청산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무리한 편 가르기와 이념적인 정책실험으로 혼선과 갈등을 초래한 끝에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DJ ‘우리끼리’ 盧 ‘편가르기’… 소외된 국민 피멍
두 정부는 대선 승리에 대해 각각 ‘50년 만의 정권 교체’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며 자신감이 확신으로, 결국은 맹신이라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자기만족)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표방했던 ‘국민통합’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지적도 많다.
‘이명박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의 그림자와 후유증을 분야별로 점검해 본다.
○ ‘우리끼리’가 부른 새로운 편향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때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외자 유치와 대외신인도 상승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를 비교적 단기간 내 봉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 상황이 안정국면에 접어들자 점차 ‘과욕(過慾)’을 부렸다는 분석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1998년 10월 발족된 대통령자문기구인 ‘제2건국위원회’다.
공무원과 정권 주변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관변단체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제2건국위’는 이른바 ‘개혁의제 개발’과 ‘의식 개조’를 앞세운 국민운동을 표방했다. 그러나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관 주도형 운동 방식을 택했고 ‘주류 교체’를 위한 정치적 음모라는 비판도 받았다.
정치 중립성을 지키며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해야 할 국가정보원에서 1999년 5월 천용택 원장 취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특정 지역 편중 인사 논란이 야기된 것도 지역갈등의 심화로 이어졌다.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낸 국회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시절 호남 출신 인사들의 요직 점유 비율은 35.7%로, 서울 경기와 영남 출신 전체를 합친 수준(35.6%)을 넘어섰다.
정권 핵심부는 입만 열면 ‘과거 50년 동안 잘못됐던 것을 바로잡는 과도기적 과정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편향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편향을 야기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이 임기 중반 이후 대북 문제를 계기로 틀어진 것도 대북 정책을 ‘햇볕’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묶어 놓고, ‘다른 목소리’는 ‘반(反)민족’ ‘반통일’로 몰아간 정권 핵심부의 독선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시스템 정치는 멀어지고, 동교동계 가신 그룹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강해졌다. 남북 정상회담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도한 언론사들이 주된 타격 대상이 된 세무조사와 공정위 조사도 집요하게 계속됐다. 요컨대 국내 정치에서는 ‘우리끼리’, 대북 문제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노선이 국민 내부의 골을 깊게 했다는 지적을 낳았다.
○ 민심과 멀어진 ‘개혁 코드’ 편 가르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반부터 능력보다는 이념적 ‘코드’를 통해 주류세력 교체를 시도했다. 각종 엘리트 집단에 대한 조롱과 역사에 대한 부정적 공격적 언급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을 낳았다.
대통령직인수위에 합류한 26명의 인수위원 중 절반을 좌파 성향 학자들로 채우고 실무는 국정운영 경험이 부족한 386 정치인들과 권력 주변의 시민단체 인사들에게 맡겼다. 초기 청와대 인사도 ‘386 개혁 코드 공유’가 최우선 조건이었다.
2004년 4·15총선 후 청와대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 만찬에서는 386 초선 의원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국가기관 장악을 일종의 ‘해방구 쟁취’로 보고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노무현 정부는 방송과 친여 매체들을 이용해 동아 조선 등 중도보수 성향 매체들을 일관되게 ‘적’으로 여기며 공격했다.
집권 초기 사립학교법 제정에 의욕을 보일 때는 사학을 보유한 종교계를 ‘사익(私益)에만 몰두한 집단’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 원로들의 고언(苦言)도 수구 보수세력의 한마디쯤으로 치부했다.
집권층이 사법부 삼성 서울대 강남 보수언론 등을 ‘5적(敵)’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말도 공공연히 확산됐다. 집권층의 기존 엘리트 배척 때문에 과거 중도보수적 정책관을 가졌던 인사조차 정부와 국회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무현 코드’에 맞춰 가는 현상도 나타났다. 재정경제부 장관에 이어 교육부총리를 지낸 대통합민주신당 김진표 의원도 그런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가 민생과는 유리된 이상주의와 탁상공론으로 ‘개혁 피로감’을 야기한 것도 결국 편향된 코드인사의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실제로 좌파 정책을 수용한 것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집권 초기부터 말과 행동에서 지나치게 좌파적 이미지를 풍겼다. 이념과 코드에의 집착으로 성과도 명분도 모두 상실한 정권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입력2007.12.29 03:38
웹폰트해제
[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2>독선이 부른 국론분열
2003년 대북 비밀송금 재판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지만 무리한 대북정책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주도했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측에 비밀리에 돈을 준 혐의로 2003년 7월 대북송금 의혹사건 제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여론에 귀막고 ‘밀어붙이기’… 햇볕도 개혁도 꼬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햇볕정책’과 ‘코드 입법’은 성역이었다. 정권 내부에서 그 정당성이나 실효성에 관한 논의가 금기시되었음은 물론이고 정권 밖의 비판에 대해서는 ‘수구’ ‘꼴통’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침묵을 강요했다.
항상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대통령, 출세를 위해 맹목적 충성을 다하는 정부 고위직과 관변 학자들, 비판세력에 대해 저주와 조롱을 퍼부으며 정권과 공생한 여당과 친여 매체, 관변 시민단체들이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좌파적 정책을 독선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소수 집권세력에 의한 국민 다수의 소외와 함께 정책의 오류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시스템의 마비로 이어졌다.
○ 독선적 햇볕정책 밀어붙여 남남 갈등 심화
2004년 총선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열린우리당이 이른바 4대 법인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신문법, 과거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고 해 이를 저지하려는 한나라당과 마찰을 빚었다. 2004년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당시 열린우리당 최재천 간사가 국가보안법 폐지안 및 형법 개정안 상정을 시도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몸으로 막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정부가 ‘퍼주기’ 논란 속에 속도와 성과에 대한 논란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대북 햇볕정책은 극심한 ‘남남 갈등’을 초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산적한 국내 현안을 제쳐 놓다시피 하면서 햇볕정책에 ‘올인’(모든 것을 기울임)하는 것을 놓고 그 배경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김 전 대통령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추진과정의 논란을 뒤로한 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퇴임 후인 2003년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정상회담 직전 4억5000만 달러를 북측에 비밀 송금한 ‘대북 뒷거래’가 드러남으로써 노벨상의 빛이 바랬다.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 조항도 내부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초헌법적 합의로 북측의 대남전술에 말려든 것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독선적 정책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거세질수록 수적 우위를 통해 이를 제압하려는 김 전 대통령의 집착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노선과 이념을 무시한 지역연합으로 출발했던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은 결국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집행에 앞장섰던 김 대통령의 측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처리에 자민련이 동조함으로써 결별에 이르렀다.
또 1997년 12월 대선 당시 국민회의(77명)와 자민련(43명)의 의석이 2년 뒤인 1999년 12월 말 국민회의 103명, 자민련 55명으로 합쳐서 과반수에 이르렀다. 여소야대를 무리하게 여대야소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 뒷거래설’이 만연했고 대야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야당을 ‘대등한 협상 파트너’라기보다는 ‘설복시켜야 할 대상’ 정도로 간주하는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지적이다.
○ 오만이 불러 온 ‘코드 정책’ 소용돌이
경찰은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12일 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내 기사송고실을 기습적으로 폐쇄했다. 출입기자들이 13일 이택순 청장과의 면담을 요구하자 의경들이 접근을 막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풍’에 힘입어 예상치 않던 과반 의석을 차지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기세등등했다.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했다”고 자랑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곧 ‘기득권층 개혁’을 겨냥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추진을 전면에 내세웠고, 나라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언론계와 교육계 등의 비판론을 봉쇄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지만 ‘참여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은 이념 대결만 극대화시켰고, 신문법은 2005년 국회를 통과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많은 독소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무리를 거듭해 개정한 사립학교법은 2년여에 걸쳐 극심한 논란을 일으켰고, 17대 대선을 앞두고 종교계의 표를 의식한 대통합민주신당에 의해 사실상 원상복구됐다. 과거사법 역시 지금까지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이나 부동산 정책, 국가정체성을 무시한 대한민국사에 대한 독선적 역사관의 강요 등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퍼주기식 대북정책과 북한 감싸기, 저자세 대북정책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대선을 2개월여 앞둔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나, 북한 핵 폐기 약속과 국군포로 등의 해결 없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경제지원 약속만 했다는 비판이 무성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모두 민주투사라는 강한 신념으로 인해 조정 타협 합의 양보보다는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며 “본인들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신념의 발로겠지만 그들을 주류로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독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코드나 뜻에 맞는 사람들과만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정상적인 시스템 작동이 결여됐고 다양한 의견 포용이 불가능해지면서 정치적인 양극화가 생겼다”고 비판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지지를 못 받은 것은 국민의 실질적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것과 독선적인 자세 때문인데 그 원인 진단을 제대로 못했다. 국민 지지 상실을 언론, 특히 보수 신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적대시했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DJ땐 ‘의원 꿔주기’… 盧정부땐 ‘당적 세탁’
정당 민주주의가 웃음거리로
민주개혁세력을 자처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체제의 중요한 축인 정당정치의 측면에서는 역설적으로 비(非)민주적인 구태를 답습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의원 꿔 주기’라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됐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공조를 통해 공동정권을 창출한 자민련이 17석 밖에 얻지 못해 원내 교섭단체(20석 이상)가 되지 못하자 그해 12월 30일 민주당은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장재식 의원이 뒤를 이었다.
‘자민련 교섭단체 만들어 주기’를 위한 이들 의원의 당적변경 사태는 결과적으로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마치 ‘물건’처럼 정당 간에 서로 주고받은 모습이 됐다.
이런 ‘의원 빌려 주기’는 정당과 의회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헌정왜곡 사례이며 ‘정당정치의 희화화(戱畵化)’라는 비판이 거셌다. 당시 민주당 지도부는 “정국 안정을 위한 살신성인이자 고육책”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송석찬 의원은 이후 2003년 본보 인터뷰에서 “정치사를 굴절시킨 나 같은 정치인은 앞으로 나오지 않기를 빈다. 나는 뒤늦게 내 행동이 국민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정당정치 파괴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탄핵 국면에 힘입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은 올해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대선을 치렀다.
원내 제1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민주당 탈당파, 시민사회단체, 손학규 전 경기지사 그룹 등 7개의 비동질적 정치세력들이 모여 대선 4개월을 앞두고 창당한 ‘대선용 정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20여 명은 당적을 6개월 새에 4차례(17대 국회 전체로는 5차례)나 바꾸기도 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정치에서는 찾아보기가 극히 드문 사례였다.
현 정부 및 자신들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성과 이를 통한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수구냉전보수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가치와 정책노선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대선용 ‘짝짓기’에 골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당은 일정 기간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 대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현 정부의 사실상 집권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고질적인 돈 선거 풍조와 정경유착이 상당 부분 사라진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또 권위주의 타파와 특권 폐지에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는 긍정론도 있으나, 지켜져야 할 권위를 상실한 채 무질서와 국격(國格)의 추락을 초래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2007년 12월 25일 화요일
총각 시절 연인은 중국인
李당선자 총각 시절 연인은 중국인` 中 언론 열광 [조인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총각 시절 연인이 중국인 처녀였다는 사실에 중국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행되는 종합 일간지 양쯔(揚子)만보가 24일 한국의 이명박 차기 대통령의 저서 ‘신화는 없다’를 인용해 이 당선자가 결혼 전에 당시 태국에 거주하던 20세 내외의 첸링(錢玲)이라는 중국 여성이었다고 소개했다.
이 신문 보도가 나간 다음 신화(新華)통신 등 중국의 거의 모든 매체가 이를 인용 보도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동아일보 26일자가 전했다.
이 당선자의‘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전말은 이렇다.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현장 사무실 옆에 한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가게 마당에 있는 (우물에) 물을 뜨러 다니다 주인집 딸 첸링을 알게 됐다. 짙은 눈썹에 흰 살결, 찻집에서 만나 보니 처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 같은 익숙한 감정이 되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나 못생겼다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당신 얼굴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맑은 눈’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눈이 매력적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첸링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보랏빛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첸링의 아버지가 딸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내게는 가게 마당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적자를 줄이기 위한 사투가 계속되면서 그에 대한 보랏빛 꿈도 차츰 퇴색돼 갔다….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그 중국집 주인은 지금쯤 통한의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만약 이 당선자가 그 여성과 결혼했다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총각 시절 연인이 중국인 처녀였다는 사실에 중국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행되는 종합 일간지 양쯔(揚子)만보가 24일 한국의 이명박 차기 대통령의 저서 ‘신화는 없다’를 인용해 이 당선자가 결혼 전에 당시 태국에 거주하던 20세 내외의 첸링(錢玲)이라는 중국 여성이었다고 소개했다.
이 신문 보도가 나간 다음 신화(新華)통신 등 중국의 거의 모든 매체가 이를 인용 보도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동아일보 26일자가 전했다.
이 당선자의‘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전말은 이렇다.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현장 사무실 옆에 한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가게 마당에 있는 (우물에) 물을 뜨러 다니다 주인집 딸 첸링을 알게 됐다. 짙은 눈썹에 흰 살결, 찻집에서 만나 보니 처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 같은 익숙한 감정이 되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나 못생겼다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당신 얼굴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맑은 눈’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눈이 매력적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첸링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보랏빛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첸링의 아버지가 딸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내게는 가게 마당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적자를 줄이기 위한 사투가 계속되면서 그에 대한 보랏빛 꿈도 차츰 퇴색돼 갔다….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그 중국집 주인은 지금쯤 통한의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만약 이 당선자가 그 여성과 결혼했다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2007년 12월 24일 월요일
이명박 반성문
[이훈범시시각각]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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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흠 많고 탈 많은 제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크고 어렵고 귀한 임무를 맡겨 주신 데 그저 감사하고 또한 송구할 따름입니다.
저의 허물과 과오에 비추어,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성원은 정말 분에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작고 밭은 그릇으로는 제게 주어진 지지표의 절반의 절반도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당선이 곧 제가 잘나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던져진 48.7%의 지지표가 꼭 저를 지지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추문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 꼭 저를 사랑하고 저를 믿어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부딪혀 나온 반사이익을 얻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느끼고 있습니다. 투표소에 가지 않은 37% 유권자들의 마음을 느낍니다. 저를 찍지 않은 51.3%의 표심을 느낍니다. 붓두껍을 들고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을 많은 유권자의 불안을 느낍니다. 저의 뒷모습에서 오만과 독선의 그림자를 보고 계시는 국민의 시선을 느낍니다. ‘이명박이가 잘할 수 있을까’, 바라보는 국민의 근심어린 표정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과거의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보셨던 대로 한없이 부족하고 턱없이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못난 짓들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을 시키겠다고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돈을 좀 더 벌어보겠다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사업을 했습니다.
사업을 일으키겠다고 제가 주인이라 위장 홍보도 했습니다.
진짜 주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잘못을 알고 손을 떼긴 했지만 부끄러운 얼룩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했습니다. 또한 번 돈을 아껴보겠다고 자식들을 위장취업도 시켰습니다.
이런 허물 중 하나만 가져도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BBK보다 자녀 위장취업 같은 추저분한 일이 국민을 더욱 분노케 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BBK 역시 잘못이 없다는 사법적 판단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도덕적 잘못까지 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덕은 없고 흉만 많은 저를 대통령에 뽑아주신 국민의 참뜻을 저는 국민께 진 빚이라 여기겠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한 점 다른 마음 없이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바스라지도록 일을 해 그 빚을 갚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5년 뒤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때 제가 모자람 없이 일을 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의 과거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10년 전, 20년 전 일이라도 가차없이 심판의 채찍을 내리치십시오. 무릎 꿇고 달게 받겠습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는 순자(荀子)의 경고를 임기 동안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12월 19일은 제 생일입니다. 대선 투표일이던 2007년 12월 19일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새롭게 거듭난 이명박이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을 국민 여러분께 성탄 선물로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2월 25일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
이명박 당선자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국민에 희망을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싶은데 뭔가 부족한 게 있다.
국민에 淪?사과다.
특검을 앞두고 있지만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 했어야 했다.
그것이 차기 대통령으로서 더욱 큰 믿음을 주는 행동이었다.
사과를 빠뜨린 그를 위해 대신 반성문을 써 봤다.
이훈범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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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흠 많고 탈 많은 제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크고 어렵고 귀한 임무를 맡겨 주신 데 그저 감사하고 또한 송구할 따름입니다.
저의 허물과 과오에 비추어,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성원은 정말 분에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작고 밭은 그릇으로는 제게 주어진 지지표의 절반의 절반도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당선이 곧 제가 잘나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던져진 48.7%의 지지표가 꼭 저를 지지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추문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 꼭 저를 사랑하고 저를 믿어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부딪혀 나온 반사이익을 얻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느끼고 있습니다. 투표소에 가지 않은 37% 유권자들의 마음을 느낍니다. 저를 찍지 않은 51.3%의 표심을 느낍니다. 붓두껍을 들고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을 많은 유권자의 불안을 느낍니다. 저의 뒷모습에서 오만과 독선의 그림자를 보고 계시는 국민의 시선을 느낍니다. ‘이명박이가 잘할 수 있을까’, 바라보는 국민의 근심어린 표정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과거의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보셨던 대로 한없이 부족하고 턱없이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못난 짓들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을 시키겠다고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돈을 좀 더 벌어보겠다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사업을 했습니다.
사업을 일으키겠다고 제가 주인이라 위장 홍보도 했습니다.
진짜 주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잘못을 알고 손을 떼긴 했지만 부끄러운 얼룩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했습니다. 또한 번 돈을 아껴보겠다고 자식들을 위장취업도 시켰습니다.
이런 허물 중 하나만 가져도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BBK보다 자녀 위장취업 같은 추저분한 일이 국민을 더욱 분노케 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BBK 역시 잘못이 없다는 사법적 판단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도덕적 잘못까지 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덕은 없고 흉만 많은 저를 대통령에 뽑아주신 국민의 참뜻을 저는 국민께 진 빚이라 여기겠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한 점 다른 마음 없이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바스라지도록 일을 해 그 빚을 갚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5년 뒤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때 제가 모자람 없이 일을 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의 과거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10년 전, 20년 전 일이라도 가차없이 심판의 채찍을 내리치십시오. 무릎 꿇고 달게 받겠습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는 순자(荀子)의 경고를 임기 동안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12월 19일은 제 생일입니다. 대선 투표일이던 2007년 12월 19일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새롭게 거듭난 이명박이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을 국민 여러분께 성탄 선물로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2월 25일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
이명박 당선자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국민에 희망을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싶은데 뭔가 부족한 게 있다.
국민에 淪?사과다.
특검을 앞두고 있지만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 했어야 했다.
그것이 차기 대통령으로서 더욱 큰 믿음을 주는 행동이었다.
사과를 빠뜨린 그를 위해 대신 반성문을 써 봤다.
이훈범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
극단주의-실용주의
뉴스위크 `한국, 이상적 극단주의서 新실용주의로` [연합]
`민주주의 성숙 따라 중간층 주도 美선거 닮아가`
"이념적 극단주의자들의 시대에서 실용주의적 중도 노선으로"지난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압도적 표차이로 당선한 데 대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민들이 그간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혼란과 현란한 수사 대신 현실적이며 가시적인 경제성장 목표를 선택한 데 따른 결과라고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2002년 대선 당시 월드컵축구 준결승전 진출과 7%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달성 등 역동적인 한국의 모습과 5% 수준으로 떨어진 GDP 성장률과 두자릿수의 청년실업률 등 현재의 경제둔화 상황을 대비하면서 한국민들의 선택은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였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함에 따라 중간계층이 주도하는 미국의 선거행태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뉴스위크는 노 대통령은 보여주지 못한 이 대통령 당선인의 '일을 추진하는 능력'에 한국민들이 주목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 대통령 당선인이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가장 성공한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해낸 사실과 서울시장 재직시 청계천 복원사업과 교통난 해소 정책 등의 성과도 소개하며 이 모든 것이 노 대통령 스스로 약속한 사회복지 확대와 사회 불평등 완화를 실현하지 못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고 지적했다.
이 후보는 또 대북정책과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한나라당의 극보수주의적 입장에서 탈피, 유연한 입장을 보여줬으며 이 같은 중도 노선이 '승리의 공식'이 됐다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한국의 젊은 유권자들은 더 이상 완벽한 정치인이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리란 꿈을 꾸지 않으며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젊은층이 이 당선인에게 돌아선 것은 이 때문이라고 뉴스위크는 분석했다.
한국민들이 이 시대에 진정 원하는 리더십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뉴스위크는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민주주의 성숙 따라 중간층 주도 美선거 닮아가`
"이념적 극단주의자들의 시대에서 실용주의적 중도 노선으로"지난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압도적 표차이로 당선한 데 대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민들이 그간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혼란과 현란한 수사 대신 현실적이며 가시적인 경제성장 목표를 선택한 데 따른 결과라고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2002년 대선 당시 월드컵축구 준결승전 진출과 7%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달성 등 역동적인 한국의 모습과 5% 수준으로 떨어진 GDP 성장률과 두자릿수의 청년실업률 등 현재의 경제둔화 상황을 대비하면서 한국민들의 선택은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였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함에 따라 중간계층이 주도하는 미국의 선거행태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뉴스위크는 노 대통령은 보여주지 못한 이 대통령 당선인의 '일을 추진하는 능력'에 한국민들이 주목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 대통령 당선인이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가장 성공한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해낸 사실과 서울시장 재직시 청계천 복원사업과 교통난 해소 정책 등의 성과도 소개하며 이 모든 것이 노 대통령 스스로 약속한 사회복지 확대와 사회 불평등 완화를 실현하지 못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고 지적했다.
이 후보는 또 대북정책과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한나라당의 극보수주의적 입장에서 탈피, 유연한 입장을 보여줬으며 이 같은 중도 노선이 '승리의 공식'이 됐다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한국의 젊은 유권자들은 더 이상 완벽한 정치인이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리란 꿈을 꾸지 않으며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젊은층이 이 당선인에게 돌아선 것은 이 때문이라고 뉴스위크는 분석했다.
한국민들이 이 시대에 진정 원하는 리더십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뉴스위크는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2007년 12월 20일 목요일
기자회견-MB
- 이번 대선의 의미와 평가“
국민들께서는 지난 10년으로는 미래로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정권교체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낡은 사고를 떨치고 국민이 좋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일하는, 매우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정부가 될 것이다.”-
‘경제살리기’를 위한 구체적 방안“
국민들 다수께서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구사항이 있는 게 사실이다. 저는 물론 경제가 산다는 것은 기업이 투자를 한다는 것으로 본다.결국 기업이 어떻게 투자를 할 것인 가 인데, 물론 규제도 풀고 여러가지 조건이 있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는 가 하는 것부터 조건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 10년동안 규제가 많아진 게 아니라, 분위기 상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인 분위기로 기업인들이 투자를 꺼려왔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됨으로서 기업인들이 투자할 수 있는 경제환경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인수위가 발족되면 많은 경제단체, 먼저 중소기업 경제단체와 직종별 경제인들을 직접 만나 새정부의 투자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겠다고 설명하겠다.출범 전부터 준비토록 하고 외국인 투자를 위해 인수위에도 그 조직을 만들려 한다. 대한민국은 투자하기 좋은 나라임을 설명하겠다.
”- 인수위 구성 방안“
마음이 급한 거 같다.(허허) 인수위는 우선 실질적인, 일할 수 있는 실무자 인수위로 만들 것이다. 어떤 형식보다는 실질적으로 정부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게 중요하다.공무원들이 10년 만의 정권교체 혼란이나 심정적 불안감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이미 준비됐고 (정권이양이) 완벽하게 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4월 총선이 있으니 정치인들은 가능한 배제하도록 하겠다.
”- 대북정책 기조 방향“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실용주의적 외교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북핵폐기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는 게 체제를 유지하고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임을 설득하려 한다. 6자 회담을 통한 국제공조와 특히 북미 회담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부가 협력해야 한다.”- 지난 10년동안 대북 포용정책속에서 한국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 등에 있어 북한 비판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앞으로는 목소리를 낼 것인가.
“국민소득이 100불 전후 했을 때 한국 경제에 협력했던 선진국들이 인권문제를 많이 지적했다. 당시 군사정부는 반대입장이었지만, 선진국의 인권의 언급이 한국 인권 진전에 도움이 됐다.북한 문제도 무조건 비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애정어린 비판은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이라도 인도적으로 지원 과정에서 북한사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을 하려 한다.”
국민들께서는 지난 10년으로는 미래로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정권교체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낡은 사고를 떨치고 국민이 좋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일하는, 매우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정부가 될 것이다.”-
‘경제살리기’를 위한 구체적 방안“
국민들 다수께서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구사항이 있는 게 사실이다. 저는 물론 경제가 산다는 것은 기업이 투자를 한다는 것으로 본다.결국 기업이 어떻게 투자를 할 것인 가 인데, 물론 규제도 풀고 여러가지 조건이 있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는 가 하는 것부터 조건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 10년동안 규제가 많아진 게 아니라, 분위기 상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인 분위기로 기업인들이 투자를 꺼려왔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됨으로서 기업인들이 투자할 수 있는 경제환경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인수위가 발족되면 많은 경제단체, 먼저 중소기업 경제단체와 직종별 경제인들을 직접 만나 새정부의 투자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겠다고 설명하겠다.출범 전부터 준비토록 하고 외국인 투자를 위해 인수위에도 그 조직을 만들려 한다. 대한민국은 투자하기 좋은 나라임을 설명하겠다.
”- 인수위 구성 방안“
마음이 급한 거 같다.(허허) 인수위는 우선 실질적인, 일할 수 있는 실무자 인수위로 만들 것이다. 어떤 형식보다는 실질적으로 정부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게 중요하다.공무원들이 10년 만의 정권교체 혼란이나 심정적 불안감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이미 준비됐고 (정권이양이) 완벽하게 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4월 총선이 있으니 정치인들은 가능한 배제하도록 하겠다.
”- 대북정책 기조 방향“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실용주의적 외교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북핵폐기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는 게 체제를 유지하고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임을 설득하려 한다. 6자 회담을 통한 국제공조와 특히 북미 회담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부가 협력해야 한다.”- 지난 10년동안 대북 포용정책속에서 한국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 등에 있어 북한 비판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앞으로는 목소리를 낼 것인가.
“국민소득이 100불 전후 했을 때 한국 경제에 협력했던 선진국들이 인권문제를 많이 지적했다. 당시 군사정부는 반대입장이었지만, 선진국의 인권의 언급이 한국 인권 진전에 도움이 됐다.북한 문제도 무조건 비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애정어린 비판은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이라도 인도적으로 지원 과정에서 북한사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을 하려 한다.”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SEOUL, South Korea
The Evolution of a Man Called ‘Bulldozer’


Supporters of presidential candidate Lee Myung-bak of the Grand National Party celebrating at the party headquarters in Seoul on Wednesday.
By NORIMITSU ONISHI
Published: December 20, 2007
SEOUL, South Korea — The man chosen as South Korea’s next president in Wednesday’s election owes much of his victory to a wildly successful project he completed as this city’s mayor: the restoration in 2005 of a paved-over, four-mile stream in downtown Seoul, over which an ugly highway had been built during the growth-at-all-cost 1970’s.
The new stream became a Central Park-like gathering place here, tapped into a growing national emphasis on quality of life and immediately made the mayor, Lee Myung-bak, a top presidential contender. The media’s glowing reviews, though, sometimes pointed out that the highway had been built by a construction company once headed by none other than Mr. Lee himself.
Few symbolized South Korea’s once single-minded focus on economic growth as Mr. Lee, who became known as the “Bulldozer.” The nickname has stuck, though Mr. Lee is now apparently ambivalent about it.
“Lee Myung-bak,” said Jeong Tae-keun, an aide who also served as one of Mr. Lee’s vice mayors, “is a man who has evolved.”
Just how much was a central question in the presidential campaign and may yet rob Mr. Lee of his victory. Although Mr. Lee had been the clear frontrunner for months, he was dogged by questions about his ethics. And a new investigation into accusations that Mr. Lee was involved in a stock-manipulation case will soon be under way. If he were to be found guilty before inauguration day on Feb. 25,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the oath of office.
His detractors say that Mr. Lee lacks the character to become president of a country that, in recent years, has made great strides in shedding itself of a history of corrupt business and politics. His supporters say that Mr. Lee, the country’s first president from the corporate world, should not be judged by another era’s ethical standards and that he remains the most competent of candidates.
But even his detractors would not deny that Mr. Lee, who celebrated both his 66th birthday and 37th wedding anniversary on Wednesday, has led an extraordinary life, portrayed as heroic in a 1990 television series called “Time of Ambition.” Rising from desperate poverty, Mr. Lee collected garbage to put himself through college. At the age of 36, he became, in a society that respects seniority, the chief executive of Hyundai Construction, a key player in South Korea’s economic development.
Mr. Lee has a reputation as a pragmatist who, in contrast to President Roh Moo-hyun, holds few strong ideological positions. As mayor, he created parks and reformed the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As president, he said his main agenda would be to revive the country’s economy.
In interviews, Mr. Lee, who has said that he would be a “C.E.O.-style president,” projects a relaxed and no-nonsense manner, relying on aides for details. In public, he appears stiff, but digs into his life story to connect with large audiences, the way he did last week at a market in the southeastern city of Taegu.
Telling his listeners that, as a young boy, he had also peddled products at the market in his hometown, in nearby Pohang, he added: “When I used to sell things at the stall there, I hated the most people who asked, ‘How’s business? How’s the economy these days?’ and then leave. Whatever people said, I was most grateful to those who bought something.”
“I know because I’ve been there,” he said to cheers.
According to his autobiography, “There Is No Myth,” he was raised in a Christian family that was so poor that he and his siblings often went hungry. A bright student, he won scholarships to an evening commercial high school. In the day, he sold popcorn in front of a girls’ high school, his face blackened by the smoke from the machine.
“Every time a girl walked by and stared at me,” he wrote, “my face burned with embarrassment.”
Mr. Lee was accepted at Korea University here, one of the country’s top colleges, and was elected student president in the business department.
Chun Shin-il, 64, a classmate and lifelong friend, said student presidents invariably came from the nation’s best high schools but that Mr. Lee was elected despite being the only student from his commercial high school.
“He had the power to organize even when he was a young student,” Mr. Chun said.
Mr. Lee became a student activist and spent several months in prison after demonstrating against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ties with Japan. He found himself on a government blacklist and unable to find work after graduation.
Instead of studying overseas like others in his predicament, Mr. Lee wrote a letter complaining to President Park Chung-hee, the military ruler at the time. Unexpectedly, a presidential aide came to see Mr. Lee who, according to his memoir, told him: “A nation becomes responsible forever for a young man if it blocks him from standing on his own two feet.”
Mr. Lee soon joined Hyundai Construction, where he rose quickly through a combination of talent, will and hard work.
No one doubts Mr. Lee’s competence but many have questioned his ethics. He has admitted falsely registering two of his children as employees of a company he owned to evade taxes, and using false addresses to enroll his children in better schools. The new investigation is into whether he had any involvement in a troubled company called BBK, at the center of the stock manipulation case. He has denied any link to the company.
Many Koreans, inured to a history of corruption among their business and political leaders, seemed ready to overlook Mr. Lee’s problems.
“Politicians are all thieves,” said Chung Jun-muk, 64, a retired construction worker who supported Mr. Lee. “At least Lee Myung-bak is smart. He may have gone into the den of thieves, but he won, both in business and politics.”
Mr. Lee’s friends, like the Rev. Kim Jin-hong, 66, put it more generously.
“Because the situation in South Korea is very complicated, it’s not very easy to be a perfect, ethical Christian,” said Mr. Kim, who has known Mr. Lee for 20 years. “But he’s had the spirit and conviction to lead a life that’s as Christian a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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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IMITSU ONISHI
Published: December 20, 2007
SEOUL, South Korea — The man chosen as South Korea’s next president in Wednesday’s election owes much of his victory to a wildly successful project he completed as this city’s mayor: the restoration in 2005 of a paved-over, four-mile stream in downtown Seoul, over which an ugly highway had been built during the growth-at-all-cost 1970’s.
The new stream became a Central Park-like gathering place here, tapped into a growing national emphasis on quality of life and immediately made the mayor, Lee Myung-bak, a top presidential contender. The media’s glowing reviews, though, sometimes pointed out that the highway had been built by a construction company once headed by none other than Mr. Lee himself.
Few symbolized South Korea’s once single-minded focus on economic growth as Mr. Lee, who became known as the “Bulldozer.” The nickname has stuck, though Mr. Lee is now apparently ambivalent about it.
“Lee Myung-bak,” said Jeong Tae-keun, an aide who also served as one of Mr. Lee’s vice mayors, “is a man who has evolved.”
Just how much was a central question in the presidential campaign and may yet rob Mr. Lee of his victory. Although Mr. Lee had been the clear frontrunner for months, he was dogged by questions about his ethics. And a new investigation into accusations that Mr. Lee was involved in a stock-manipulation case will soon be under way. If he were to be found guilty before inauguration day on Feb. 25,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the oath of office.
His detractors say that Mr. Lee lacks the character to become president of a country that, in recent years, has made great strides in shedding itself of a history of corrupt business and politics. His supporters say that Mr. Lee, the country’s first president from the corporate world, should not be judged by another era’s ethical standards and that he remains the most competent of candidates.
But even his detractors would not deny that Mr. Lee, who celebrated both his 66th birthday and 37th wedding anniversary on Wednesday, has led an extraordinary life, portrayed as heroic in a 1990 television series called “Time of Ambition.” Rising from desperate poverty, Mr. Lee collected garbage to put himself through college. At the age of 36, he became, in a society that respects seniority, the chief executive of Hyundai Construction, a key player in South Korea’s economic development.
Mr. Lee has a reputation as a pragmatist who, in contrast to President Roh Moo-hyun, holds few strong ideological positions. As mayor, he created parks and reformed the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As president, he said his main agenda would be to revive the country’s economy.
In interviews, Mr. Lee, who has said that he would be a “C.E.O.-style president,” projects a relaxed and no-nonsense manner, relying on aides for details. In public, he appears stiff, but digs into his life story to connect with large audiences, the way he did last week at a market in the southeastern city of Taegu.
Telling his listeners that, as a young boy, he had also peddled products at the market in his hometown, in nearby Pohang, he added: “When I used to sell things at the stall there, I hated the most people who asked, ‘How’s business? How’s the economy these days?’ and then leave. Whatever people said, I was most grateful to those who bought something.”
“I know because I’ve been there,” he said to cheers.
According to his autobiography, “There Is No Myth,” he was raised in a Christian family that was so poor that he and his siblings often went hungry. A bright student, he won scholarships to an evening commercial high school. In the day, he sold popcorn in front of a girls’ high school, his face blackened by the smoke from the machine.
“Every time a girl walked by and stared at me,” he wrote, “my face burned with embarrassment.”
Mr. Lee was accepted at Korea University here, one of the country’s top colleges, and was elected student president in the business department.
Chun Shin-il, 64, a classmate and lifelong friend, said student presidents invariably came from the nation’s best high schools but that Mr. Lee was elected despite being the only student from his commercial high school.
“He had the power to organize even when he was a young student,” Mr. Chun said.
Mr. Lee became a student activist and spent several months in prison after demonstrating against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ties with Japan. He found himself on a government blacklist and unable to find work after graduation.
Instead of studying overseas like others in his predicament, Mr. Lee wrote a letter complaining to President Park Chung-hee, the military ruler at the time. Unexpectedly, a presidential aide came to see Mr. Lee who, according to his memoir, told him: “A nation becomes responsible forever for a young man if it blocks him from standing on his own two feet.”
Mr. Lee soon joined Hyundai Construction, where he rose quickly through a combination of talent, will and hard work.
No one doubts Mr. Lee’s competence but many have questioned his ethics. He has admitted falsely registering two of his children as employees of a company he owned to evade taxes, and using false addresses to enroll his children in better schools. The new investigation is into whether he had any involvement in a troubled company called BBK, at the center of the stock manipulation case. He has denied any link to the company.
Many Koreans, inured to a history of corruption among their business and political leaders, seemed ready to overlook Mr. Lee’s problems.
“Politicians are all thieves,” said Chung Jun-muk, 64, a retired construction worker who supported Mr. Lee. “At least Lee Myung-bak is smart. He may have gone into the den of thieves, but he won, both in business and politics.”
Mr. Lee’s friends, like the Rev. Kim Jin-hong, 66, put it more generously.
“Because the situation in South Korea is very complicated, it’s not very easy to be a perfect, ethical Christian,” said Mr. Kim, who has known Mr. Lee for 20 years. “But he’s had the spirit and conviction to lead a life that’s as Christian a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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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시화호 유니버설 스튜디오
[사설] 화성 유니버설스튜디오 성사 작전 필요하다
입력 : 2007.11.28 22:51 / 수정 : 2007.11.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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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화성시, 수자원공사가 미국 유니버설스튜디오와 테마파크·골프장·컨벤션센터·호텔·상가 등 복합 리조트시설을 조성하기 위한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화성시 시화호 남쪽 간석지에 들어설 한국 유니버설스튜디오는 470만㎡로 미국 올랜도(180만㎡)와 로스앤젤레스(169만㎡) 유니버설스튜디오의 2배가 넘는다. 예정대로 내년 상반기 본계약을 맺게 되면 2012년 3월 開場개장을 목표로 2조9000억원의 국내외 자금이 투입된다.경기도는 건설 단계에서 생산 5조원, 고용 4만9000명의 유발효과가 있고 운용 단계에선 매년 생산 2조9000억원, 고용 5만8000명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54만㎡인 일본 오사카 유니버설스튜디오는 연간 5조9000억원, 75만㎡인 로스앤젤레스 디즈니랜드는 3조5000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實益실익에 더해 국내 관광·문화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유니버설스튜디오가 화성을 선택한 것은 수도권 인구가 2400만명이나 되는 데다 인천공항에서 35㎞ 거리여서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테마파크가 들어서는 화성의 송산그린시티 지역이 해양리조트와 생태공원, 자동차 테마파크 등을 갖춘 관광·레저·휴양도시로 개발될 계획이어서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음직하다.유니버설스튜디오 유치가 확정되려면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몇 년 전엔 덴마크 레고社사가 이천에 테마파크를 세우려다 수도권 규제에 막혀 포기한 일이 있다. 작년엔 부산시가 미국 MGM과 테마파크 설립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서울시도 디즈니랜드 유치 계획을 밝혔으나 협상 과정에서 조건이 맞지 않아 지지부진한 상태다.프랑스가 디즈니랜드를 유치할 때는 정부 예산 4300억원을 들여 고속지하철 연장과 TGV역 신설 공사를 해줬고, 부지를 16년 전 農地농지 가격으로 공급하고 세금도 깎아줬다. 화성 유니버설스튜디오가 ‘레고랜드’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부 차원의 유치를 위한 전략과 決斷결단이 있어야 한다.
입력 : 2007.11.28 22:51 / 수정 : 2007.11.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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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화성시, 수자원공사가 미국 유니버설스튜디오와 테마파크·골프장·컨벤션센터·호텔·상가 등 복합 리조트시설을 조성하기 위한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화성시 시화호 남쪽 간석지에 들어설 한국 유니버설스튜디오는 470만㎡로 미국 올랜도(180만㎡)와 로스앤젤레스(169만㎡) 유니버설스튜디오의 2배가 넘는다. 예정대로 내년 상반기 본계약을 맺게 되면 2012년 3월 開場개장을 목표로 2조9000억원의 국내외 자금이 투입된다.경기도는 건설 단계에서 생산 5조원, 고용 4만9000명의 유발효과가 있고 운용 단계에선 매년 생산 2조9000억원, 고용 5만8000명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54만㎡인 일본 오사카 유니버설스튜디오는 연간 5조9000억원, 75만㎡인 로스앤젤레스 디즈니랜드는 3조5000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實益실익에 더해 국내 관광·문화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유니버설스튜디오가 화성을 선택한 것은 수도권 인구가 2400만명이나 되는 데다 인천공항에서 35㎞ 거리여서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테마파크가 들어서는 화성의 송산그린시티 지역이 해양리조트와 생태공원, 자동차 테마파크 등을 갖춘 관광·레저·휴양도시로 개발될 계획이어서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음직하다.유니버설스튜디오 유치가 확정되려면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몇 년 전엔 덴마크 레고社사가 이천에 테마파크를 세우려다 수도권 규제에 막혀 포기한 일이 있다. 작년엔 부산시가 미국 MGM과 테마파크 설립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서울시도 디즈니랜드 유치 계획을 밝혔으나 협상 과정에서 조건이 맞지 않아 지지부진한 상태다.프랑스가 디즈니랜드를 유치할 때는 정부 예산 4300억원을 들여 고속지하철 연장과 TGV역 신설 공사를 해줬고, 부지를 16년 전 農地농지 가격으로 공급하고 세금도 깎아줬다. 화성 유니버설스튜디오가 ‘레고랜드’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부 차원의 유치를 위한 전략과 決斷결단이 있어야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코리아 리조트


화성시에 세계 최대 유니버설 스튜디오
2012년 개장…MGM스튜디오도 내달 중순 용지 결정
세계적 테마파크인 유니버설스튜디오와 MGM스튜디오의 한국 진출이 가시화하고 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와 MGM스튜디오의 한국 진출을 전담하고 있는 USK와 MSC는 한국 시장 선점을 위한 치열한 막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수자원공사는 27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USK 측과 유니버설스튜디오 코리아 리조트 조성을 위한 2조900억원 규모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11월 20일자 보도 유니버설스튜디오 코리아는 경기도 화성시 신외동 일원 송산그린시티 동측 470만㎡에 조성돼 2012년 3월 중 개장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테마파크를 비롯해 시네마 월드와 테마상가로 구성된 시티워크, 워터파크, 프리미엄 아웃렛, 컨벤션센터, 골프장, 스파ㆍ세러피 시설을 갖춘 웰니스센터, 호텔 등이 들어서게 된다. 경기도는 유니버설스튜디오 유치로 건설단계에서만 5조원 규모 생산유발 효과와 4만9000명 고용 효과, 연 1900억원대 조세수입 증대 효과가, 운영단계에서는 연간 2조9000억원 상당 생산유발 효과와 5만7000명 고용 유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USK 측은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2400만명에 달하는 수도권 배후인구는 물론 인천공항과도 가까워 중국 등 외국 관광객 유치에도 유리한 송산그린시티를 테마파크 용지로 최종 선정했다. 송산그린시티 개발사업은 시화호 남측 간척지인 화성 송산면 등 5686만㎡에 6만가구,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광레저형 생태환경도시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 유니버설 vs MGM = USK 관계자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예정용지 문제가 풀렸기 때문에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MGM도 이에 뒤질세라 속도를 내고 있다. MSC 관계자와 MGM 유치를 희망하는 정부투자기관 대표는 이번주 미국을 방문해 MGM 측과 최종 협상을 벌일 예정이다. MGM 측 예정용지는 12월 중순께 발표된다. 용지 문제는 유니버설 측이 먼저 매듭을 풀었지만 유니버설과 MGM 한국 측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에 있어서는 MGM 쪽이 한발 앞서 있는 상황이다. USK가 유니버설과 맺은 계약은 `EOA(Exclusive Option Agreement)`인 반면 MSC는 MGM과 `ELA(Exclusive Licensing Agreement)`를 맺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EOA는 `독점 교섭권` 혹은 `독점적 선택 협약`에 해당하고 ELA는 `독점적 사업권`이다. USK 관계자는 "유니버설 측과 맺은 EOA 계약은 2년간 시효가 인정된다"며 "그 안에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예정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MSC 관계자는 "이미 45년간 유효한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용지 문제만 해결된다면 MSC가 주체가 되어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왜 선점 경쟁을 벌이나 = 유니버설과 MGM 측이 한국 시장에 먼저 깃발을 꽂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시장 크기와 관계가 있다. 3조원 가까운 초기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테마파크 사업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객단가(방문객 한 사람이 쓰는 비용) 7만원 기준으로 연간 800만명 정도 입장객을 받아야 한다. 동시에 세계적인 규모를 갖춘 테마파크 2개를 동시에 수용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이들이 테마파크 용지로 수도권을 고집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연간 800만명 이상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내국인 수요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천공항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들은 외국인 관광객 비율을 20~30%로 잡고 있다. USK 관계자는 "외국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는 테마파크는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뿐"이라며 "이런 측면에서 유니버설 측 경쟁력이 더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MSC 측에서는 "유니버설은 이미 일본 오사카에 있고 두바이와 싱가포르에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런 곳을 한번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한국 유니버설을 다시 찾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동북아에서는 MGM 경쟁력이 더 높다"고 반박했다. [김기철 기자 / 김철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7.11.28 06:58:23 입력
2007년 12월 4일 화요일
데릴사위 정권
[김창균 칼럼] '데릴사위 정권'의 마지막 효도
김창균 정치부 차장 ck-kim@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7.12.0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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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균 정치부 차장
김창균 정치부 차장 ck-kim@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7.12.0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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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균 정치부 차장
선거는 제로섬게임이다. 한쪽 사정이 좋아지자면 상대 쪽은 형편이 기운다. 그래서 선거에서 맞붙는 양 진영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반대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선 이런 대칭 이미지가 깨지고 있다. 지역적으로 영남, 이념적으로 우파(右派)인 유권자들은 정권 재탈환이라는 10년 숙원을 이번만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벼른다. 반면 현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 및 좌파 진영에선 선거에 대한 전의(戰意)가 느껴지지 않는다.
5년 전, 10년 전 선거 때는 한 표를 행사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들도 선거를 치르는 당사자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언성을 높였다. 술집에서 선거 얘기를 하다 주먹다짐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내 후보’니 ‘네 후보’니 따지는 장면조차 드물다. 승부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운 것이 한 원인이겠지만, 그것만으론 “정권을 되찾겠다”는 쪽과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쪽의 온도차를 설명하기 힘들다.“
12월 19일 선거날 부산, 대구, 광주에서 동시에 ‘이겼다’는 함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즐겨 쓰던 레토릭(수사·修辭)이다. 노 후보 자신은 부산 출신이고, 자신을 후보로 낸 민주당은 호남이 텃밭이니 자신이 당선되면 영·호남 두 지역의 공동 승리가 된다는 말이었다.
동화 같은 이 비전은 노 정권 출범 직후부터 정반대로 풀려나갔다. 노 정부는 호남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북 송금 특검을 밀어붙이더니 민주당을 둘로 쪼개 호남 표밭을 분열시켰다. 마지막 결정타는 “호남 유권자가 나를 찍은 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었다. 노 정권에 대한 호남 정서는 애(愛)에서 증(憎)으로 옮겨졌다.
호남과 틀어졌으면 영남에서라도 반사 지지를 받아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오죽했으면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문재인 비서실장(당시 전 민정수석)이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 언론인들을 만나 “노 대통령이 부산 출신이고, 퇴임 이후도 이 지역에서 살 텐데 왜 부산정권으로 인정해주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했겠는가.
좌파 진영도 노무현 정권을 남의 식구 취급한 지 오래다. 자이툰 파병, 한·미 FTA 체결 결정 등을 문제 삼아 노 정권 이마에 ‘신(新)자유주의’ 딱지를 붙여 놓고, 아예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진짜 속내는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정권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1997년 대선 때 영남 유권자들은 “김대중 후보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해코지 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불안해했다. 2002년 대선 때는 호남 유권자들이 “정권이 되넘어 가면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정권을 쥔 쪽이 ‘선거에 지면 우리는 죽는다’는 심리 상태였으니 선거 분위기가 살벌해 질 수밖에 없었다.
2007년 대선엔 정권을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진영이 없다. 노무현 정권은 영남에도, 호남에도 ‘우리 정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우파는 물론 좌파도 노 정권에 대해 “우리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집권 세력이 국민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다. 그래선 국정(國政)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지난 5년 동안 4800만 국민이 그 값을 치렀다.
그러나 노 정권의 ‘왕따현상’은 임기 막바지에 한 가지 순기능을 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사생결단식으로 싸웠던 영·호남이 이번 대선만큼은 ‘뺏고, 뺏긴다’는 강박관념 없이 맞이하게 된 점이다. 영남 출신으로 호남에 장가들었던 ‘데릴사위 정권’이 5년 내내 양가(兩家)에 불효했던 것이 ‘마지막 효도’로 돌아오게 됐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blog+] 왜 Googol이 아니고 Google 일까? [JES]
원래 이름은 ‘10의 100승’ 뜻하는 구골
한 엔젤 투자자의 실수로 이름 바뀌어
필자 뿐 아니라 인터넷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조차도 미국의 'Google.com'이라는 웹사이트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가 검색 서비스 업체로 앞서나가고 있지만 세계를 돌아보면 '구글 천하'입니다.
네이버는 이웃을 의미하는 '네이버후드(neighborhood)'에서 차용한 말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구글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구글 네이밍에 얽힌 에피소드는 이렇답니다.
구글의 젊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처음 만난 때는 1995년입니다. 이들이 벤처 창업을 결심했을 때 처음 정한 이름은 '구골(Googol=10의 100승)'이었습니다.
이들이 벤처 회사의 이름을 구골로 정한 이유는 인터넷에 무수히 많이 깔려 있는 웹페이지를 모두 다 검색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럼 어떤 연유로 구골(Googol)이 아무 뜻도 없는 구글(Google)로 바뀌었을까요?
모든 대학생 창업자들이 그러하듯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게는 기술과 열정, 그리고 성공에 대한 야망은 있었지만 초기 창업자금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럴 때 실리콘밸리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들이 엔젤(angel, 개인 벤처 투자가들)이었죠. 이 두 사람도 98년에 투자를 받기 위해 한 엔젤 투자가를 찾아갔습니다. 그 투자가는 바로 앤디 벡톨샤임이었습니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었죠.
앤디 벡톨샤임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를 가르쳤던 교수님의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실리콘밸리의 팔로 알토에 있는 교수님의 집에서 벡톨샤임을 만나 사업 설명을 했죠.
당시 벡톨샤임은 브린과 페이지의 사업 계획에 대해 흥미를 느꼈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약속으로 시간이 급했다고 합니다. 그때 벡톨샤임이 "좋습니다. 우리가 (비즈니스 플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냥 제가 수표를 드리면 어떨까요?"라고 말했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엘리베이터 피치(투자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짧은 시간에 사업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 성공한 셈이죠.
이때 벡톨샤임이 10만 달러의 수표 앞에다 쓴 단어가 'google Inc'이었습니다. 급한 나머지 벡톨샤임이 실수로 스펠링을 잘못 쓴 것인지,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0의 100승을 뜻하는 '구골'이 검색 서비스 회사인 '구글'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구글은 잭팟을 터뜨렸고 벡톨샤임은 10만 달러를 투자해 20억 달러 이상을 벌었습니다. 구글은 전세계인이 이용하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고요. "I googled it(나 정보 검색했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구글은 일반명사가 되었고 현재는 구골보다 더 유명한 단어가 되었답니다.
이름쟁이 [namist.egloos.com]
*이 글은 블로그 플러스(blogplus.joins.com)에 올라온 블로그 글을 제작자 동의 하에 기사화 한 것입니다.
원래 이름은 ‘10의 100승’ 뜻하는 구골
한 엔젤 투자자의 실수로 이름 바뀌어
필자 뿐 아니라 인터넷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조차도 미국의 'Google.com'이라는 웹사이트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가 검색 서비스 업체로 앞서나가고 있지만 세계를 돌아보면 '구글 천하'입니다.
네이버는 이웃을 의미하는 '네이버후드(neighborhood)'에서 차용한 말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구글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구글 네이밍에 얽힌 에피소드는 이렇답니다.
구글의 젊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처음 만난 때는 1995년입니다. 이들이 벤처 창업을 결심했을 때 처음 정한 이름은 '구골(Googol=10의 100승)'이었습니다.
이들이 벤처 회사의 이름을 구골로 정한 이유는 인터넷에 무수히 많이 깔려 있는 웹페이지를 모두 다 검색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럼 어떤 연유로 구골(Googol)이 아무 뜻도 없는 구글(Google)로 바뀌었을까요?
모든 대학생 창업자들이 그러하듯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게는 기술과 열정, 그리고 성공에 대한 야망은 있었지만 초기 창업자금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럴 때 실리콘밸리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들이 엔젤(angel, 개인 벤처 투자가들)이었죠. 이 두 사람도 98년에 투자를 받기 위해 한 엔젤 투자가를 찾아갔습니다. 그 투자가는 바로 앤디 벡톨샤임이었습니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었죠.
앤디 벡톨샤임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를 가르쳤던 교수님의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실리콘밸리의 팔로 알토에 있는 교수님의 집에서 벡톨샤임을 만나 사업 설명을 했죠.
당시 벡톨샤임은 브린과 페이지의 사업 계획에 대해 흥미를 느꼈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약속으로 시간이 급했다고 합니다. 그때 벡톨샤임이 "좋습니다. 우리가 (비즈니스 플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냥 제가 수표를 드리면 어떨까요?"라고 말했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엘리베이터 피치(투자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짧은 시간에 사업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 성공한 셈이죠.
이때 벡톨샤임이 10만 달러의 수표 앞에다 쓴 단어가 'google Inc'이었습니다. 급한 나머지 벡톨샤임이 실수로 스펠링을 잘못 쓴 것인지,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0의 100승을 뜻하는 '구골'이 검색 서비스 회사인 '구글'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구글은 잭팟을 터뜨렸고 벡톨샤임은 10만 달러를 투자해 20억 달러 이상을 벌었습니다. 구글은 전세계인이 이용하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고요. "I googled it(나 정보 검색했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구글은 일반명사가 되었고 현재는 구골보다 더 유명한 단어가 되었답니다.
이름쟁이 [namist.egloos.com]
*이 글은 블로그 플러스(blogplus.joins.com)에 올라온 블로그 글을 제작자 동의 하에 기사화 한 것입니다.
열차 여행 같은 인생
열차 여행 같은 인생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한 날에는
열차를 타고 잠시 종착역까지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역에 열차가 멈출 때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리 인생 살이의 여행에도
미쳐 종착역에 닿기 전에
도중에 내리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질병의 역에서
사고의 역에서
실패의 역에서
혹은 달리는 열차에서
창밖을 향해 귀중한 생명을 버리기도 합니다.
비록 내가 오늘날의 삶이
특실이 아니면 어떻고
식당칸이면 또 어떻습니까
좌석이 없어 앉아가지 못하고
힘들게 서서 가면 또 어떻습니까..
달리는 동안에는
열차에 몸을 맡기고
차창 넘어 펼쳐지는풍경에 시선을 두고
슬픔이나 상념을 잠시 잊으면 됩니다.
아니면 옆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마주 잡고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단한 요기를 하며
삶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열차는 만남의 기쁨을 주는가 하면
헤어지는 슬픔도 있고
이별의 아픔도 있으며
삶의 즐거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있는
우리 인생의 喜怒哀樂을 싣고 달립니다.
어차피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 모두다 내려야만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열차를 타는 동안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긍적적인 생각과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과 기쁨을 만끽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 여행을 하셨으면 합니다.
* * * * * * *삼성출신들의 한마음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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