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일중전쟁上]韓中日대만 교과서 비교
많은 피를 흘리며 무수한 비극을 낳은 일중 전면 전쟁-. 이 전쟁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각 나라에서 폭넓게 사용하고 있는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를 비교해 본다.
●일본 - ‘난징(南京)대학살’이란 호칭을 바꾸다
일본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일본군 사진. 낙타로 물자를 옮기고 있다. 전선이 확대되어 일본군의 보급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가 보인다.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도쿄 서적(東京書籍)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일중 전쟁과 전시하의 일본 사회체제를 2페이지에 걸쳐 취급한다.
일중 전쟁의 시작에 대해서는 “베이징(北京) 교외의 루거우차오(盧溝橋) 에서 일어난 일중 양국군의 무력 충돌(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로부터, 일중 전쟁이 발발했습니다”라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한편,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국민당 정부를 대신하는 친일 정권의 출현을 기대하여, 이들과 화평 교섭을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민중의 항일 의식은 한층 더 높아져, 일본의 단기 결전 예상은 빗나가고, 일중 양국이 총력으로 싸우는 전면 전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낙타로 물자를 운반하는 일본군 병사의 사진을 실고 “일본군에게는 장기화되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보급 수단도 부족했습니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보급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전쟁을 계속한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일본군에 의한 가해 행위나 잔학 행위에 관한 기술은 적고, 난징(南京)사건에 대해서도 본문과 ‘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군은 (중략) 수도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을 대량으로 살해했습니다(난징(南京)사건)》=본문
《이 사건은, 난징(南京)대학살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만,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주
동사의 10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이라고도 한다”라고 본문에서 기술했으며, 사건의 호칭도 ‘난징(南京)대학살’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러한 가해 행위 기술은 ‘자학적이다‘라는 비판이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영향으로 고쳐진 형태다.
와타나베 노리오(渡辺能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희생자의 수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 것을 배려했다. 호칭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는 ‘대학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주’에 나타냈다”라고 말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沢龍彦))
●한국 -‘항일’의 시점에서 7줄만 기술
일중 전쟁은, 한국에서는 ‘중일 전쟁’이라 부른다. 중학교에서는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에서 다루고 있다.
집필자가 취재에 응해준 디딤돌 출판의 교과서에서는, 제2차 대전과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 등에 대해, 3군데에 걸쳐 총 7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침략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였다(중・일 전쟁)》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순식간에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끈질긴 항쟁으로 일본군은 중국 대륙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협력 관계를 이루어, 함께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2차 국・공 합작)》
집필자인 김육훈 태릉고교 교사는 “미국이 일본을 꺾어, 제2차 대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지만, 중국 민중의 저항도 일본의 패배에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자국사를 취급하는 『국사』는 1 종류 뿐인 국정교과서이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한국인의 독립 운동과 중국 측과의 협력을 중시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인 등을 살해한 윤봉길의 ‘의거’를 채택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으며,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인의 항일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난징(南京)사건에 대해서는, 고등학교의 “세계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금성 출판의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은) 화북으로 진출하여 전면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난징에서는 수십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난징대학살)》
사쿠라이 이즈미(桜井泉)
●중국 - 12 페이지 사진을 많이 사용하여 생생하게
중국에서 반수 이상의 학교가 사용하고 있는 인민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 8년 급』에서는, ‘중화 민족의 항일 전쟁‘이라는 단원에서, 전면 전쟁의 발발에서부터 일본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12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전쟁의 발단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밤, 일본군은 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군사 연습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병사 1명이 실종한 것을 구실로, 완평현성(宛平縣城)의 수사를 무리하게 요구했고, 중국 수비군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을 도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일본군은 난폭하게도 중국 수비군을 향해 진공하고, 완평현성(宛平縣城)을 포격했다. (중략)전국적 규모의 항일 전쟁이 여기서 발발했다. 루거우차오(盧溝橋)사변은 7•7 사변이라고도 불린다》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중국의 “역사 과정 표준”에서는 중일 전쟁에 대해서, ① ‘7•7 사변’의 역사적 사실을 약술하고, 중국의 전 민족적 항전이 시작된 것을 안다 ②난징(南京)대학살 등을 예를 들어, 일본 군국주의의 흉폭하고 잔인한 침략 본질을 인식한다 ③ ‘대아장(臺児荘)격전’과 ’백단(百團) 대전’등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용맹 과감성과 희생을 마다 않는 정신을 실감한다, 라는 3가지 점을 요구하고 있다.
교과서는 이 방침에 충실히 따른 내용이며, 주요 전투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교과서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중국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서는 “ 근거지의 군민들을 지도하여 완강히 항전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난징(南京)대학살’에 대해서는 2페이지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4장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는 것 외에도 ‘100명 살해’를 겨루고 있는 장교들을 알리는 신문의 한 지면도 소개하고 있다. 피해자 수의 기술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의 통계에 의하면, 일본군이 난징(南京)을 점령한 6주 동안에 학살당한, 무기도 가지지 않은 주민과 장병의 수는 30만 명 이상에 달한다 》
사토 카즈오(佐藤和雄)
●대만 - 황민화 운동 강화에 초점
대만 교과서에서는, 중일 전쟁은 중국사, 대만사, 세계사 모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널리 사용되는 남일 서국(南一書局)의 『국민 중학•사회』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중일 전쟁과 중공(中共) 정권의 발전’이란 단원에서 약 2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민족의 활력은, 중국 공산당의 발전과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중국인은 8년에 이르는 고난의 항전을 거쳤으면서도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개별적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난징(南京)사건에 대해서만은 《일본군은 난징(南京)에 진입하여, 죄가 없는 민중 30만 명을 참살하였다고 하는 난징(南京)대학살이란 참사를 일으켰다》라고 말하고, ‘100명 살해’의 상황을 전한 일본 신문의 사진도 싣고 있다.
대만사 부분에서는 ‘식민지 통치의 강화’라는 단원으로 약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특히 전시 체제하에서의 황민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6년, 총독부는 ‘황민화, 공업화, 남진 기지화’를 선언했다. 대만은 전시 체제에 들어가고, 황민화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대만 호적을 가진 군인•군부가 대량으로 징용되었으며, 그 중에는 전선에 보내져 위안부가 된 여성도 있었다》
또한, 세계사 부분에서도 제2차 대전 설명 중에 2줄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국민당 정권 시대인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장제스(蔣介石)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한편, 항일 통일 전선을 같이 진행한 공산당에 대해서는 “항전을 위장하여 지반을 확장했다”라고 비판을 했지만, 현재 교과서에는 이러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남일 서국(南一書局)의 교과서 편집 지도위원인 초호이민(周恵民)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공산당 세력 확대로 이어진 1936년의 시안(西安)사건이 없었더라면, 중일 전쟁의 발발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전쟁 그리고 장제스(蔣介石)에 대한 소개보다도, 시안(西安)사건과 중일 전쟁에 관한 밀접한 관계를 설명했다”라고 편집 방침을 말했다.
다무라 히로쓰구(田村宏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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