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일중 전쟁
1937년 7월부터 약 8년 동안에 걸쳐 일본이 중국을 침략 전쟁이다. 지금의 베이징(北京) 교외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을 계기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여, 1941년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 후, 1945년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 중, 일본은 많을 때에는 약 100만 명의 병력을 중국에 주둔시켰다. 양국의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사망자는 누계 약 45만 명이라 보고 있다. 중국 측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으로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 전쟁으로 간주하고 이 동안의 중국 군민의 사상자 수는 ‘3500만 여명’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남쪽의 화북 5성으로부터도 장제스(蔣介石)가 인솔하는 국민당의 영향을 제외하려고 분단 공작에 들어갔다. 한편,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 항일’로 내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당초에는 불확대 방침이었던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군부 선행으로 파견 증가를 결정해, 중국 측은 철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은 처음에는 ‘북지(北支)사변’, 후에는 ‘지나(支那)사변’이라 부르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지만, 이는 미국의 중립법 적용을 초래해 군수물자의 수입이 막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승리한 일본군은 더 나아가 수도 난징(南京)으로 진격해 12월 13일에 점령하였다. 이를 전후로, 병사도 민간인도 구별하지 않고 난징(南京)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독가스와 세균을 사용하고, 인체 실험을 했으며, 성 폭력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거듭하였으며, 무차별 폭격도 가했다.
국민당 정부는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서 항전을 계속했다.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도 게릴라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부전 조약과 9개국 조약을 개의치 않는 일본의 전쟁 행위는 국제사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지만, 1941년에는 대미영 개전으로 전선을 확대해 갔다.
【키워드】9개국 조약
1922년 2월,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그리고 일중 양국의 총 9개국이, 중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의 존중, 문호 개방, 기회 균등 등을 확인하고 합의한 조약이다. 무력으로, 중국에게 새로운 권익을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는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구미 제국주의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메모】고노에 후미마로
(1891~1945) 일중 전쟁에서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3번 수상을 역임했다. 공작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麿)의 장남으로 태어나, 귀족원 의장 등을 거쳐서 1937년 6월에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을 발족시켰다. 직후부터 시작된 일중 전쟁에서는 전선을 확대시켜, 난징(南京)을 공략한 다음 달인 1938년 1월에 “이후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내고 평화의 길을 닫아 버렸다. 같은 해, 국가 총동원법을 성립시켜 전시 통제 경제를 추진하고, ‘동아 신질서’를 주창한 제2차 고노에(近衛) 성명을 발표했다. 1940년 제2차 내각에서는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를 결성하는 한편,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제3차 내각에서 일미 평화 교섭에 실패하여 총사직한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으로 출두를 명령받아 음독자살했다.
【메모】 장제스 (蔣介石)
(1887~1975) 중국 저장성(浙江省) 태생이다. 이름은 ‘중정(中正)’으로, 제스(介石)는 성년이 된 후의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한 후, 쑨원(孫文)의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28년에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외국과 싸우려면 우선 국내의 안정이 필요하다고‘안내양외(安内攘外) ’를 내걸어,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1936년 12월, 항일을 위해 내전 중지를 요구하는 장쉐량(張学良)등에 의해 시안(西安)에 감금되었다(시안(西安)사건). 파견되어 온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来)등의 설득도 있었기에 요구를 받아들이고 난징(南京)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국민당 정부군을 인솔하여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이 패전한 후,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지자, 타이완(台湾)으로 피해 사망할 때까지 초대 중화민국 총통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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