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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0일 화요일

우와 시원하다ㅡ(김동길 교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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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길 교수님 말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대통령에게 책임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나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도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제35대 대통령 존-에프 케네디의 ​
Ask not what your country,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말이 기억납니다.

아~ 5.16. 신의 은총이 이 땅에 내린 날

박정희 장군이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의 고향인 대구 근교에서 여당이던, 야당이던 국회의원에 출마 하였으면 당선이 되었을까?

99.999 % 낙선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박정희가 누구 인줄 대구 시민들은 몰랐다.

당시는 금품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고무신, 막걸리, 국밥, 양은냄비, 비누, 수건 등을 뿌리지 않으면 당선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시절 이었다.

당시 박정희가 돈이 어디 있었나?

청렴강직하기로 소문이 났던 박정희가 무얼 뿌린단 말인가? 당선은 택도 없는 소리이다. 대선출마? 미쳤나?

박정희가 이런 바보짓을 하지 않은 게 오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60년 전통 야당을 운운하는 자 들에게는 비극이요, 재앙인 일이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5.16을 맞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재삼 생각해 보아도 박정희가 선택한 구국의 용단은 옳았고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 이름 석자 앞에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아낌없이 붙인다!

위대한 박정희의 등장에 최대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60년 전통 야당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는 좌파들은 사실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 이기는 마찬가지 이다.

왜냐 하면, 박정희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당시 국민들과 피와 담을 흘릴때, 당시 야당 정치인, 좌파들은 박정희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 발목잡기에 혈안이었으니까?

아무것도 한일도 없이 그들도 뒤로는 역시 부자가 되었지 않는가?

박정희가 공업정책을 세우면, 농업정책이 우선이라고 거품을 물었고, 고속도를 딱는 현장에 당시 김대중은 땅바닥에 들어 누워 발광을 한 것은 당시 신문보도,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때의 야당 정치인들과 오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부의 3년여 동안 반대와 발목잡기에 혈안인 야당과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독자들 중에 누가 한번 대답 좀 해보시라!

위대한 박정희는 당시 오늘과 같은 반대를 제 2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을 일으켜 기여코 한강의 기적을 창출케 했다. 정말로 위대하고, 또 위대했다.

이런 말은 글이나 쓰고, 말이나 해서 먹고 사는 이 나라 언론인, 평론가,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못하는 말이다.

우리 같은 쫄장부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 혹자는 박정희를 공과를 따져가면서 평을 한다!

혹자는 박정희가 민주 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라고 악평을 한다. 정말 구상유취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돼지고기 국에 흰 쌀밥을 싫컨 먹어 보는 게 소원인 위대한 수령의 나라 북한을 보라!

조선의 딸들이 되넘의 늙은 총각에게 씨받이로, 노리개로 팔려가는 어버이 수령의 북한을 보라!

수백만의 주민을 굶겨 죽인 위대한 원수, 김일성 동지가 만든 지상 낙원을 보라!

최고 존엄의 그림자를 밟으려고 했다고 기관 단총 세레에 화염방사기 추가 써비스를 해주는 떠오르는 태양 김정은의 나라를 보라!

박정희의 공과가 어떻다고?

박정희가 민주 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라고?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비록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 만은 바로 하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을 해결해주고, 오늘 세계에서 12번째로 잘살게 해주고, 세계 5대 첨단공업국, 6대 무역강국,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준 위대한 박정희를 욕하는 자들은 인면수심의 동물 같은 자들이다.

위대한 박정희는 모든 것을 혼자 질머지고 저승세계로 갔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인간들! 너희들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완벽한 인간이길래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찾냐?

도대체 너희들의 민주주의는 뭐냐? 너희들 좌파 정권 10 년동안 무얼 했냐?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다!

5.16은 신이 한국인들에게 박정희를 앞세워서 준 은총이다. 위대한 박정희의 명복을 정중히, 진심으로 빈다.

독재자 세종대왕[군사쿠테타]

세종은 독재자였다. 反민주적이었다. 세종은 노예제도를 지지했다. 세종은 지배계급인 양반들을 지지했다.

소수의 착취계급과 다수의 피착취계급으로 구성된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지지했다.

거대한 장원과 수많은 노비들을 거느린 부르주아 귀족들을 지지했다.

세종은 황해도 일대를 재산으로 가진 엄청난 부동산재벌이자 不在지주였다.

세종은 골육들을 죽인 살인마 태종을 아버지로 두었으며, 침략자 명나라를 정벌할 군대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찬탈하고 高麗왕족 王씨들을 학살한 살인마 이성계를 할아버지로 두었다.

즉, 세종은 요즈음 친일파에 해당하는 親元派의 후손이다. 세종은 침략자였다.

국경지역에 살던 여진족 주거지역에 쳐 들어가 여진족을 다 몰아냈다.

세종은 호색(好色)·호육(好肉)하였다. 첩이 5명이나 되고, 자식은 18남4녀로 22명이나 두었다.

비만한 몸으로 종합병동이라 할 정도로 전립선 질환, 당뇨병 등 온갖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육식을 몹시 즐겼다.

세종은 자식교육에 실패해 아들 수양이 손자 단종을 죽이게 만들었다.

단종은 방에 갇혀 펄펄 끓는 방 구들에서 타 죽었다. 요즈음 같으면 큰일 날 일이다.

아들들 병역문제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이회창을 보라.

사위 마약문제로 곤욕을 당하는 김무성을 보라. 세종은 측근관리에 실패했다.

큰형 양녕대군이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 지방관들로부터 장계(狀啓)가 빗발쳐 올라왔으나 처벌하지 않고 끝까지 형을 비호(庇護)했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왕(충녕대군)과 부처(효령대군)를 동생으로 두었으니, 살아서는 감옥에 갈 일이 없고 죽어서는 지옥에 갈 일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세종에 대한 上記 부정적인 평가는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아무도 세종대왕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존경할까?

그건 지금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시대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전(全)세계 어디나 王政을 했기 때문이며, 다른 나라 왕들과 비교해 보면 세종은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세상에 악마 아닌 사람이 없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폭군이 아닌 통치자가 없다. 하지만 통치자는 사람인 이상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통치자를 지금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대와 환경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36년의 식민지배와 3년의 軍政을 거친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 지나지 않던 지난날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당시의 선진국들이 아니라 당시에 독립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과 비교하는 것이 순리이다.

초등학생을 대학생과 비교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시작도 훌륭했고 산업화 시작도 훌륭했으며, 산업화 성과도 훌륭했고 민주화 성과도 훌륭했다.

67년 만에 기존의 수백 년 전통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들 턱밑까지 좇아갔다.

100여개 다른 신생독립국들은 모두 까마득히 저 밑에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턱없이 높은 기준으로 대한민국 초창기의 ‘민주주의의 수준과 산업화의 공’을 폄하하는 것은 일종의 과대망상이다.

그렇게 뛰어난 민족이라면, 처음부터 가난하지 말고 또 식민지도 되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건 나라이건 겸허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평가하고 주어진 상황 아래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다.

세종대왕 시대의 관료들만 먹던 동빙고의 얼음을 박정희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먹을 수 있는 냉장고를 만들었다.

입만 열면 초창기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잘났는가?

韓民族에게 도대체 무슨 기여를 얼마나 했는가?

​ 軍事 구테타가 必要한 事態

현직 대학교수가 자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반세기전 했던 ​​군사쿠데타가 다시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봉규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달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군사쿠데타가 필요한 사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하 교수는 "반세기전 4·19(혁명) 이후 출범된 장면 정부는 신파와 구파라는 당대 갈등으로 식물 정부가 됐고, 자유당 이래로 관행화된 언론, 대학, 야당들의 무책임이 극에 달해 군사 쿠데타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어 "50년 전 군사쿠데타가 필요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반세기전 정치부패와 민생파탄에 빠진 조국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사쿠데타를 선택했고, 이후 조국근대화의 위업을 달성했던 자랑스런 국군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민주주의가 아무리 높은 가치일지라도 조국안위보다 높을 수는 없다"며 "질서와 교양이 포기되고 범죄와 패륜이 판치는 사회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진 1987년 이후의 상황에 대해 "민주화 25년은 반 영웅이 대통령으로 민주주의가 종북 친공으로 변질된 전도와 반역의 시도였다"며 "가치관이 전도된 미쳐버린 조국을 구할 애국군인들이 다시 한번 나설 때"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 박정희 전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이 다시 일어날 분위기"라는 내용의 글도 올렸다.

그는 "지금 감지되는 기운은 10·26의 냄새다.

지금 국난의 상황은 청와대가 백설공주와 7난장이 놀음을 한가하게 허용할 상황이 아니다"라며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이냐 아니면 처참한 종말이냐 오직 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이날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한국은 쿠데타를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한 번 더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며 "지금은 1997년 구제금융위기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기 때문에 쿠데타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생각해야 한다 뜻"이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1992년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저서로는 < 국가경영: 국가개조의 리더십>, <한국정치와 현대 정치학> 등이 있다.

첨언하는 말

이런 생각을 하봉규 교수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종북세력이 이렇게 난동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합법적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의사 선거에 의해서 당선된 대통령을 사퇴하라는 세력은 전부 잡아서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선거와 부정선거운동은 다른것이다.

인터넷에 쪽지글 단것은 부정선거 운동이냐, 아니냐를 가릴 일이지 부정선거가 아니다.

이것을 부정선거라고하면서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나라를 망치자는 것이다.

자유도 좋고, 언론도 좋지마는 헌법을 부정하고 국법질서를 부정하는 종북세력은 이 나라에는 필요 없는 인종들이다.

자기 개인의 출세욕, 무리들의 출세욕 때문에 국가를 망치는 세력들은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자유가 좋고, 언론의 자유도 좋다. 그것이 무제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고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국가의 안녕질서와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 국권을 훼손하는 무리들을 척결할 때가 왔다.

이것을 그냥 두면 개미구멍으로 방천이 무너지듯 국가가 위험해진다.

설마 하지마라.? 설마가 사람 잡는다.

나라가 상처를 받으면 우리민족이 100년~200년이 걸려도 회복하기 힘든다. 세계의 역사를 보라.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 만에 나라를 찾았는가. 국정원은 더 강해져야 한다.

이스라엘 에는 유명한 정보기관 <모사드> 가있다.

이 <모사드>가 있기 때문에 아랍제국의 협박과 압력 속에서 건장히 살아간다.

이스라엘 국민은 <모사드>가 있어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국을 위해서 궐기하자. 이 혼란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

군사 구테타가 오기 전에 우리나라를 재건하고 구해야 한다.

종북세력 제거하고 조국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것도 애국자다.

장성택이 처럼 육신을 벌집을 만들고 재가 되어 날아가고 싶은 사람은 종북을 하라.

차라리 종북의 본거지로 가라. 잠에서 깨어라. 기지개를 켜라. 내일이면 늦다.

오늘부터 하자. 국민들이여! 조국을 구하고 민족을 구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그가 어릴 때 그를 등에 업고 다니며, 극진히도 돌봐주시던 누님이 딱 한 분 계셨다.

동생이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 누님은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어렵게 살아 올케가 되는 육영수 여사에게 좀 도와 달라고 어려운 부탁에 편지를 보냈다.

이를 받은 육 여사는 친·인척 담당 비서관에게 이 편지를 건네 주었다.

당시 이 비서관은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이었고, 박 대통령의 집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 모르게 은행에서 대출을 알선해 (일종의 압력이었음) 박 대통령 누님의 아들에게 택시 3대를 사서 운수업으로 먹고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으나, 나중에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박 대통령은 大怒해서 친구이기도 했던 담당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를 처분함과 동시에 누님과 조카를 고향으로 내 쫓아 버렸다.

이 조카는, "삼촌! 대한민국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습니다."라며 울먹이면서 대들었지만, 박 대통령은 단호하게 고향으로 쫓아 버렸다.

누님의 원망을 들은 박 대통령은 "누님 제가 대통령 그만두면 그 때 잘 모시겠습니다." 며 냉정하게 누님을 외면했다.

그 후 누님은 할 수 없이 대구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통령인 동생을 원망하면서… 단 한 분 그것도 자신을 극진히 돌봐 주시던 누님이 어렵게 살고 있는데, 대통령이 된 지금 이렇게도 냉정하게 뿌리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총을 들고 혁명을 일으킨 진정 메마른 눈물을 가진 독재자였기에 때문에 감정 없는 그런 인간이었을까?

피를 나눈 혈육의 정까지도 마다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며, 사리사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관이 확실한 애국심을 가지고 이 나라 4,000만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탁월한 영웅, 대한민국 역사 이래 진정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라! 후임 지도자들을… 그 누구 하나 부정부패 비리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지도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직 대통령들의 자식들이 감옥에 가 있음을…

박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인척 그 누구도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고, 청와대 초청 한번 안 했으며, 또, 박 대통령 자녀 중 누구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지도 않았고, 단 한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았으며,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인간이 재물에 대한 욕망은 그 끝이 없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재산은 죽은 후 주머니에서 십만 원과 고물시계를 팔에 차고 있었던 것 뿐이였으며, 그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단군이래 대한민국 지도자 중, 단 한 건에 비리도 없었던 박 대통령 말고 또 그 누가 있었다면 말해 보라.

대통령은 커녕 출세했다, 장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제 자식 취직자리부터 먼저 챙기는 썩어빠진 것들이 개혁을 외치며, 박 대통령을 헐뜯으려 단점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어찌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이 어찌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참으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초등학생 불러다 놓고, 이같이 설명하며 물어봐라.

대한민국 역사 이래 누가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훌륭한 지도자였느냐고, 살인범 김재규를 민주화인사 운운하는 자들아…

박 대통령 사후 지난 수십 년 간 그의 정적들이 박 대통령을 깎아내리려 눈에 불을 켜고 비리를 찾아보려 했으나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역사를 똑바로 세워야 된다며 친일파 청산이란 명제 하에 박 대통령을 몰아붙이고 연초부턴 한일 외교 문건과 문세광 비밀문건을 공개, 흠집 찾기에 몰두하더니,

화풀이 분풀이 욕구 해소라도 해야겠다고 박 대통령 친필인 '광화문' '운현각' '충의사' 현판을 뜯어내고 부시고 뽀개고 빠개고 하는 것이란 말이더냐…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좌파들이 박 대통령을 헐뜯으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며 ​매도하려 발버둥치는 것을 보니, 혈육의 정까지도 냉정하게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청렴결백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이 나라에 진정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보릿고개 굶주림은 박정희대통령 때 없어졌고, 간첩잡자'는 말은 김대중, 노무현 때 없어졌다."

   교수 김동길

<정치와 언론이 망치고 있는 나라>20160826

<정치와 언론이 망치고 있는 나라>20160826
-특단의 조치로 정화시키지 않으면 자멸한다-​

북한은 8/24일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인 SLBM을 발사했다.
발사 각도를 高角度로 올려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도 신포앞
바다에서 500여 KM를 날아가 일본 방공 식별구역에 떨어졌다는 보도다.

이를 고각도로 쏘지 않고 정상 각도로 쏘았다면 2,000~2,500km 정도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발사했다는 평가다. ​
북한은 작년 5월 SLBM 발사실험을 시작한 뒤 네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가
이번에 성공함으로써 성공! 성공! 성공중의 성공! 승리 중의 승리! 라며
성취감에 날뛰고 있다. ​

지상에서 쏘는 미사일은 발사 기지가 있고 이동 발사대도 탐지하기 쉽기
때문에 사전 파괴 가능성이 높지만 SLBM은 바다 속에서 움직이는 잠수함
활동을 탐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상 미사일보다 더 위협적이다. 우리는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안보 라인을 총동원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심지어 중국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도
이 심각성에 대해 유엔 안보리를 긴급 소집해 2시간 동안 비공개 회의를
열고 규탄성명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으는 등 세계가 들끓고 있다. ​

이처럼 우리가 처해 있는 안보현실은 죽느냐 사느냐,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될 것이냐 하는 위중한 문제가 코앞에 닥쳤어도 이 땅 대한민국은,
각 계층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각자 잇속에 눈이 어두워 자기
계산에만 열을 올리는 한심한 작태들이다. 죽고 사는 것도 모르고
먹이를 물고 늘어지는 승냥이 떼 같다.​

조그만 틈만 있어도 정부 여당을 물고 늘어져 정치적인 잇속 차리는데
혈안이 돼 있는 정치 모리배들과 언론권력을 이용해 정부를 쥐고
흔들려는 언론, 국가야 어찌됐든 나는 손톱만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심에 찌든 사람들 때문에 최소한의 조치인 사드 배치 장소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 이 나라에 어디 희망이 있어 보이는가?​

북의 핵 운반 수단인 SLBM의 성공뿐이 아니다. 내부적 압력과 압박에
견디다 못한 북의 핵심 고위급 인사들의 탈북 러쉬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미국대선, 유럽 등 세계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이 모든 것들은 우리 한반도에 엄청난 변화와 영향을 끼칠 요인들이지만
우리의 정치판과 언론은 남의 일 보듯 하고 딴 짓들만 하고 있다. ​

언제 우리에게 폭풍처럼 휘몰아쳐 올지 알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할 생각
보다는 대통령 비서관 하나 때려잡고 정부를 흔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꼴들이란, 마치 망하는 길로 들어서기로 작정한 자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요즘 SNS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들 가운데 "조선일보와 우병우 청와대
수석, 이석수 특별감찰관,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뒤얽힌
이야기"를 보면 할 말이 없다.​

권력과 언론의 유착, 언론의 요구가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 기사화,
여론화, 정치문제화 함으로써 언론이 정부와 권력을 길들이기 하는
수법을 보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언론이 세상을 정화시키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판과
여론에 불을 지르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로막거나 혼선을 빚게
만들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신문사가 방송사가 국가와 국민 공익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해관계,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기 편의대로 정부와 정권을 길들이는 개인
도구로 전락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언론
깡패일 뿐이다. ​

언론은 비록 개인기업이라 할지라도 국가와 국민전체를 위한 공익기능을
할 때만이 진정한 언론이요, 사회의 목탁이며 정부와 정치의 부패를
막는 사회의 소금이다. 제 스스로 썩고 병들어 갈등을 부채질하고
言論 社主나 언론인 개인을 위해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그 보다 위험한
도구는 없다.​

나는 요즘 SNS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들 가운데 "조선일보와 우병우
청와대수석, 이석수 특별감찰관,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뒤얽힌
이야기"를 보며 믿을 수없는 내용이고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국민이 들고일어나 여론화하고 싸워서 바로
잡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좀 거칠지만 내가 받은 카톡
내용을 옮겨 싣는다.​

1. 이석수와 조응천은 서울법대 81학번 동기로 매우 절친한 사이다. 이석수가 느닷
없이 특별감찰을 하겠다고 한 배경에는 조응천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 조응천이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 시절 우병우의 검사장 승진을 스크린 했다.
그때 역삼동 땅 등을 모두 확인해 봤던 것이다. 우병우 관련 의혹 등은 조응천이
정봉주 등 제3자를 통해 흘렸다는 것.

3. 당초 진경준이 다리를 놨다는 조선일보 보도는 사실상 오보임이 드러났다. 이어
흘러나온 화성 땅, 가족회사 정강 등이 지엽적인 의혹으로 이어졌다.
4. 조선일보 첫날 보도를 보면 1면 톱에 禹 수석 축이나 처갓집의 반론이나 해명성
기사는 전혀 없었다. 우병우 측은 이에 대해 이미 조응천이 스크린할 때 포함돼
있었고 자신이 사인하고 해명했기 때문에 신문은 반론을 취재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그냥 일방적인 기사를 냈을 것으로 생각.​

<조선-한겨레-경향의 당합과 특별감찰관의 등장>
1. 추측컨대 조선일보는 조응천으로 비롯된 의혹 등을 경향 한겨레 등과 공유
하며 경향 한겨레가 보도하면 이를 받아 다시 확대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좌파적 수법으로 사안을 키워 왔음.
2. 더 이상 딱 부러지는 건이 없어지자 조선일보 박두식 사회부장은 사내에서 코너에
몰리게 됐고 돌파구를 찾는다고 찾은 게 이석수 특별감찰관이라는 것.

3.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박두식의 상문고등학교 선배이자 조응천의 절친한 법대
동기라는 점에서 이석수-조응천-박두식의 연결 고리가 형성됐다.
4. 여기에 조응천과 조선일보 주용중 역시 법대 동기이고 과거 청와대 정윤회 문건
사건당시 3면 전면을 조응천이 인터뷰로 덮은 전력이 있음...
5. 조선의 행태가 目不忍見이라는 점이 이 보도의 시작이고 그것이 별 볼일 없어지자
새로운 고리로 이석수를 찾았다는 것.​

<조선이 왜?>
1. 조선 법조팀이 무리하게 역삼동 땅으로 치고 나온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사장이 사면 등 2건의 민원을 우병우에게 부탁했는데 거부된 것이다,
2. 둘째 조선주필 송희영이 남상태 대우조선 전 사장 연임 로비를 둘러싸고 본인에
대한 의혹과 관련해 조선법조 1진 이진명이 매일 밤 대검 부패범죄 특별수사단장
김기동의 집 앞에 뻗치면서 송희영까지 불똥이 번지는 상황이 이어질지를 염탐함.

3. 송희영이 법조팀이 머무는 서초동 오피스텔에 와서 기자들을 채근 이 과정에
송희영의 내연녀로 알려진 박수환(58.여 뉴스커뮤니케이션대표-홍보업체)이 효성
그룹 분란 당시 변호사로 일하던 우병우와 함께 일하면서 아는 사이였고 송희영
은 박수환을 통해 우병우에게 상황 파악을 함과 동시에 사실상의 민원을 시도
했는데 박수환이 실제 우병우에게 접촉하지 못했음.

4. 추측컨대 박수환이 실제 접촉하지 못하고 송희영에 대한 과오가 있으니 만나서
말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말했을 것으로...
5. 결국 송희영이 완전 열 받아서 총력전 지시를 했고 그 과정에 우병우를 조질
건수를 갖고 있는 자가 없는지 찾아 보던중 검사장 승진 스크린을 했던 조응천이
있었고 조응천과 철친한 주용중이 다리를 놨을 것이라는...

6. 이후 조응천과 박두식은 거래가 시작됐지만 그 거래 결과가 용두사미로 끈날
상황이 되고 조선사장실에서 받을 빼려 했음.
7. 박두식 사회부장이 핀치에 몰렸고 그 관정에서 특별감찰관 이석수를 통해 반전을
노리자는 전략을 세우게 됐고 이석수는 검찰이 별 무소득이 될 것을 예감하고
검찰로 넘겨버린다는 방침을 세움.

8. 검찰로 넘긴다면 맞든 틀리든 우병우 건은 다시 불거지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
거라고 판다. 이런 설득을 하기 위해 윗선 그리고 옆 동료들에게 특별 감찰관과의
통화내용을 정리해 돌리면서 기다려봐라 한 것임.​

<송희영-박수환 내연관계설>
1. 박수환은 98년도 뉴스 커뮤니케션이라는 홍보대행 업체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남상태 대우조선 전 사장의 연임 로비에 연루
됐다는 의혹 때문이다.

2. 박수환이 민유성 전 상업은행장과 친분이 있는 것을 안 남상태가 민유성에게 연임
로비를 하기 위해 박수환 회사 뉴스 커뮤니케이션에 20억이라는 홍보대행 계약을
해줬고 박수환이 민유성에게 로비...

3. 남상태 사장 시절 대우조선이 10억짜리 피텍필립을 구입했는데 그 시계가 송희영
에게 흘러 들어가는 등 송희영이 거의 영화 내부자 수준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

<위 내용을 카톡으로 보내준 사람에 대한 나의 답장>
조선일보의 보도가 어쩐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보내주신 글을 보니 신문을 보고 석연치 않거나 이해가
안 되던 것이 이해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

야당은 물론 조선 동아...등 영향력 있는 언론사들은 전 부터 귀신도
모르게 집권세력과 정부, 재벌 등과 알게 모르게 거래를 하며 공생해
왔던 것이 관행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추악한 단면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칙과 국익은 어떻게 되든 정치권, 언론, 법조, 대기업 등이 요란하게
떠들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주고 받아가면서 슬쩍 넘어가던 것이
정치적인 관행이었고 그걸 잘 하는 사람이 정치를 잘 하는 사람처럼
굳었던 것이죠. 부정부패에 뿌리박고 공존했던 것이 이 나라의 정치적
관행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는 답답하고 숨 막힐 정도로 그런 정치적 관행이
통하지 않으니 과거의 관행이 뼈 속까지 물들어 버린 부패한 인간들은
미치고 펄쩍 뛸 일 아니겠습니까?​

박근혜가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그런 것을 바로 잡겠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잘못일까요? 박통은 정치적으로 치루게 될 어려움과
상당한 손실을 각오하고 과거 어느 정권도 엄두내지 못했던 일,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겠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잘못된 관행이 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치권과 언론에서 말하는
불통 아니겠습니까? 야당도 언론도 웬만한 건 봐줘가며 정치를 한다면
쉬울 텐데 담을 쌓고 있으니 정치도 언론도 불통 딱지를 붙여서 못살게
흔들고 있다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내막도 모르는 사람들은 정치권과 언론이 떠드는 것만
보고 박근혜 불통을 복창하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통이
뭐가 불통인가요? 국민 각자와 자기와 소통해야 通인가요?​

아무리 방향을 옳게 집고 일을 해나가려 한들 야당이 사사건건 반대요,
언론이 하는 일마다 비난 일색이요, 그러면 물정 모르는 국민들이
그렇게 쏠려 버리니 대통령인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대통령 결단으로 할 수 있는 큰일들은 엄청나게 많이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시작전권 이양시기의 무기(?)연기및 재검토 문제,
통진당 해산, 개성공단 폐쇄, 전교조의 법외노조화, 핵연료 재처리합의,
사드배치 합의...등은 과거 정부에서는 하고 싶었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국회절차를 거쳐야하는 일들은 야당이 무조건 반대, 무조건 물고
늘어지고 언론이 기사로 옭아매기 때문에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하루가 급한 경제 활성화 법안은 몇 년째 국회에 묶여있지
않습니까, 경제적 어려움과 취업문제 해결을 위한 금년도 추경예산안도
미뤄지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나라 꼴이
이게 뭡니까? 류 형이 보내준 글은 지금 이 나라 정치 언론의 부패
매카니즘과 박근혜 흔들기를 이해하고 감 잡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글을 읽으며 "정치와 언론이 망치는 나라", '특단의 조치로 시급히
정화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는 자멸할 것같다'는 공포감이 듭니다.​

박근혜 정부 흔들기의 핵심 축은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북한입니다.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무서운 속도로 파고들어 본색을 드러내다시피
하는 친북 좌파세력의 준동과 대북 커넥션입니다. 그 얘기는 여기서
않겠습니다.
http://blog.naver.com/wiselydw/220797058399

2016년 8월 26일 금요일

黃의 전쟁과 ‘결단의 힘’

🇰🇷黃의 전쟁과 ‘결단의 힘’🇰🇷
기사승인 2016.08.18. 08:53:55

- [심층분석]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체제 수호’ 신념의 황교안

황교안은 대한민국 체제이념 전쟁의 최전선에 지휘관으로 섰고,
그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의 무기였던 법치주의는 언제나 자유민주에로의 결단이었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무거운 침묵 속에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최후 변론을 시작했다. 통진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청구 재판이었다. “통진당 해산은 헌법을 파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존립을 지키기 위한  헌법적인 결단입니다.”
짧고 단호한 황 장관의 이 진술에는 상당히 무겁고 튼튼한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명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허락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로 성립한 우리 헌법의 체제 수호 명제였다.
이 원리를 ‘결단주의’라고 부른다. 1956년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가 독일공산당을 위헌정당으로 해산 심판할 때 적용한 법리였다. 황 장관은 그러한 ‘결단’의 필요성을 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작은 균열이 둑을 무너뜨립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합니다. 통진당이 정당으로 존재하는 한, 국민의 안전을 지켜낼 수 없으며 종국적인 국가 안보의 확보가 불가능 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정당을 해산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억압과 굶주림의 고통을 짊어지게 할 것인지가 이번 심판에 달려 있습니다.” (2014.11.26.)
결국 헌법재판소는 통진당에 대해 위헌정당 해산 심판 결정을 내렸고, 통진당은 해산됐다. 통진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 심판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상황은 돌이켜 보건대,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국정원의 대선 개입 논란에 통진당은 선두에 섰고, 이를 통해 2012년 대선 자체를 무효화 하려는 초헌법적 선동이 벌어지고 있던 터였다.
야당과 좌파 시민단체들은 사실상 통진당의 지도 하에 있었다. 정권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가 통째로 위협을 받던 시기였다. 그 배경에는 ‘채동욱 검란(檢亂)’이라고 불렸던 검찰發 ‘쿠데타’의 조짐마저 가세했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유죄로 전제하고 무리하게 국정원장 원세훈을 타깃으로 삼았다.
하지만 법무장관 황교안의 대응은 주도면밀했다. 그는 먼저 검찰의 원 국정원장에 대한 무리한 예단적 수사를 법리로 제지한 후, 통진당 이석기 RO사건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를 철저하게 밀어붙였다. 국정원 댓글 사건과 이석기 RO사건, 그리고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청구라는 거대한 삼각파도의 ‘체제 법리전쟁’이 대한민국 내부에서 벌어졌다.

헌법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전쟁에서 황교안은 모두 승리를 얻어냈다. ‘Mr.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을 얻는 그가 30년 가까이 산전수전을 겪으며 오로지 공안 검사라는 외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황교안 총리는 대검찰청 공안3과장, 공안1과장, 서울중앙지검 2차장 등을 역임했고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펴낼 정도로 공안 업무에 정통했다.
그는 마치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판관 기드온과도 같았다.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던 우상신 바알의 제단을 뒤엎고, 신성히 여겨지던 아세라 상을 찍어 넘어트렸던 기드온에게는 이스라엘을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소명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기드온은 먼저 내부의 적들을 소탕해야 했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그 시대는 오늘날 이념과 정치가 하나인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소명은 황교안에게도 있었던 것일까. 그는 대한민국의 헌정 이념을 흔들어 대던 ‘종북’이라는 우상, 내부의 적(敵)을 타도하는 일에 이미 일찌감치 소명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황교안은 ‘칼(KAL)기 폭파범 김현희 사건’, ‘임수경 밀입북 사건’ 수사를 맡았고 지난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로 재직할 당시엔 '국정원 불법도청사건'을 수사해 전직 국정원장인 임동원, 신건 씨를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황교안도 노무현 정권의 종북성에는 어쩌지 못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논란이다.
황 총리는 당시 이 사건의 책임자였다. ‘강정구 사건’은 2005년 12월 서울지검 공안1부가 계간지와 인터넷매체 등에 북한 선전·선동에 동조하는 글을 기고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강 교수를 사법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강정구는 ‘6·25 전쟁은 통일 전쟁이며 내전’, ‘미국이란 외세 개입 안했으면 한 달만에 끝났을 전쟁’ 등을 운운하며 북한의 6·25 도발을 정당화하는 이적성의 글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것.
2001년에도 강 교수는 김일성의 생가인 북한 만경대를 방문해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고 쓴 사실이 전해져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반복되는 이적성 활동에 검찰은 강 교수 사건에 대한 경찰 지휘 과정에서 구속 수사하는 쪽으로 내부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내세워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고, 김 총장은 이에 반발해 취임 6개월여 만에 사퇴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하던 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황교안 총리였던 것이다.
황 총리는 이 사건을 한 교회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에) 검찰에 의해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또 곱지가 않겠지요. 그러던 중 제가 사건 하나 잘못 처리했어요. 그분이 볼 때. 제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는데, 공안부에서 어떤 교수 하나를 구속하겠다는 거예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그런데 석 달쯤 전에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런 거를 처벌하면 되겠느냐,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제가) 보고를 받아보니까 구속 사안이 맞아요. 구속하겠다는 의견을 올렸어요. 검찰총장도 보고를 딱 받아보고 ‘구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런 생각 들었어요.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를 해보니깐 구속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장관은 ‘대통령의 뜻을 극단적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 이래 가지고 (총장은) 이건 부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어요.” - 2011년 5월 11일 부산 호산나교회 특별 강연 中-
출세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검사
이 사건으로 검사였던 황교안 차장검사는 노무현 정부에 찍혀 좌천의 길을 가야 했다. 대한민국의 헌정을 수호하겠다는 검사 황교안의 의지가 종북을 비호하던 노무현과 그 친위세력들에 의해 모욕을 당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2009년 MB정부에서 황교안은 창원지검장으로 발탁되어 재기에 성공했고, 창원과 울산의 불법 파업과 시위를 엄단해서 좌파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2009년 1월부터 8월까지, 황 지검장이 발령난 창원지검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입건된 사람은 모두 415명이었는데 이 숫자는 2008년 집시법으로 입건된 사람 261명에 약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노조가 주도한 파업 찬반투표 행위와 도심 집회 등은 국가 또는 지방공무원법에 위배되는 불법 집단행동”이라며 전국공무원노조 부위원장 노모 씨 등 간부 8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고, 공무원 집단행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전국공무원노조 차봉천 위원장이 구속 기소됐다.
황 총리가 어떤 계기로 공안검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경기고 재학 시절 황 총리는 학도호국단장을 맡을 정도로 국가관이 남달랐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와 고교 동창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나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고, 그는 학도호국단장이었다. (황 총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 나랑은 많이 달랐다”며 국내 한 진보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한 황교안은 김대중 정부 시절 공안검사라는 호칭을 해당 검사들이 대부분 부담스러워할 때도 당당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핵심들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 내지는 유연성을 주장하며 ‘新공안’이라는 개념을 검찰에 강요했다. 이와 함께 원칙주의 공안검사들에 대해서는 ‘舊공안’이라는 낙인을 통해 인사 불이익을 줬다. 황교안은 그때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펴내 “국가가 존속하는 한 체제 수호에 관한 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김대중 정부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줬다.
이 책은 그가 검찰 안에서 ‘공안통’으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계기가 됐다. 황교안은 <한겨레>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구공안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황교안은 김대중 정부 시절 공안검사들에 대한 인사 탄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97년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됐어요. 김대중 씨는 계속 재야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조사 받고 검찰에서도 조사 받고, 정부하고는 계속 갈등했던 분 아닙니까. 대통령 되기 전 서경원이라는 국회의원이 북한에서 가져온 돈을 받았습니다. 
그게 문제가 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수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된 일이 있었어요. 검찰과 야당 사이에 적대관계가 심했는데 이런 분이 딱 대통령이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었던 검사들은 물론 소위 ‘공안통’으로 이름나 있는 검사들은 전부 좌천되는 거예요. 평상시 같으면 갈 수 없는 보직으로 막 발령 내버렸어요. 6개월마다 인사를 하는데 첫 번째 인사에서 공안검사들이 굉장히 고통 받고, 두 번째 인사에서도 그런 고통을 주고, 세 번째 인사에서도 고통을 주니까 많은 검사들이 사표를 내고 나가고 이랬습니다.”
- 2011년 5월11일 부산 호산나교회 특별 강연 中-
황교안의 이러한 솔직하고 용기 있는 태도는 출세주의에 쉽게 빠지는 여느 검사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의 법치에 대한 소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반인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황 총리가 율사로서 교회법에 정통해 이 분야에 여러 권의 책을 냈다는 점은 황교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법치주의와 기독교정신
교회법은 고대에서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오늘날 실정법의 기초가 된 법이다. 교회법이 ‘세계 법의 뿌리’라는 평가를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회법이 일반 사회법에 미친 영향 중 가장 우선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천부인권’ 사상과 모든 사람이 (神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을 들 수 있다.
교회법에서 처음으로 실현된 이 평등사상은 이후 거의 전 세계 모든 법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남녀평등, 노예제도의 폐지, 신분 계급의 타파에 기여했다. 교회법은 로마법과는 달리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강조했으며 여성의 법률적 지위를 높이고 성년이 된 여성에게 결혼의 자유를 인정했다. 또 오늘날에 당연시되는 인권에 대한 개념도 일찍부터 교회와 교회법에 의해 도입되었다.
교회법은 또 형벌의 목적에 대해서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응보의 속죄벌과 함께 교정벌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국가 형벌제도의 완화에 기여했으며 교회법의 영향을 받아 많은 나라들이 태아나 유아 살해, 부녀 약탈 등을 범죄로 처벌하게 됐다.
황 총리가 이러한 교회법에 정통하다는 사실은 그가 법치에 대해 냉랭한 공의를 넘어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실제로 황 총리는 국내 최초의 기독교 민간 교도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형벌이 아니라, 교화가 법의 진실한 목적이라는 점을 그는 민간 교도소 설립 취지에서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황교안은 단지 검사라는 직분의 직업 소명을 넘어서서,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이에게는 소명이 따른다. 
국가의 지도자는 인기와 표를 위해 국민이 원하는 것에만 귀를 기울이는 자가 아니라, ‘국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는 자여야 하며, 또 이를 위해 결단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고전 정치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러한 지도자에 의해서만 ‘Good Society’, 즉 ‘좋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고 믿기에 주장하고 행동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그러한 주장이 ‘더 나음’을 가져오는 ‘좋은 것’인지를 결정자는 따져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이 없는 이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부여된 주권은 국민 개개인이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위임된 권력에 의해서만 결단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총리 황교안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원칙 없는 시대가 모든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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