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전 국무총리(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가 작년 12월 27일 나꼼수 멤버인 주진우 기자 소속 주간지 ‘시사IN’과 인터뷰한 내용이 충실해 갈무리 해뒀다. 그는 4·11총선에 대해 “한나라당이 몰락할 것이고, 총선에서 지면 박근혜 대세론은 더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의 영남 패권주의가 무너지고, 충청에서도 발을 못 붙이는 상황”이라는 진단이 첨부됐다. 불과 석 달 보름 뒤의 일을 하나도 못 맞혔다고 비웃을 수는 없다. 그땐 그런 예상이 이상하지 않았다.
‘선거판을 읽는 최고의 전략통’이라고 잡지에 소개된 그는 자신의 총선 출마에 대해 “별 생각 없다. 배지 없으면 진두지휘 못하나?”라며 “집권하면 또 총리 하면 되지, 아니면 대통령 자문위원장 같은 거…”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80여 일 뒤인 3월 19일 그는 세종시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 교수인들 3, 4개월 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또 자신의 생각은 어떻게 바뀔지 충분히 알까 싶다.
이 전 총리는 “2016년에 다시 총선이 있는데, 이때 진보진영 집권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나라당을 궤멸시키자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는 첫 집권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나라당 후신인 새누리당에서 좌파진영을 궤멸시키겠다는 야심가를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민주통합당에는 “당한 만큼 되갚겠다”고 공언하는 인물이 적지 않다.
‘대세 無常’ 보여준 4·11총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탄생하기 10개월 전인 2002년 2월 22일 민주당은 대선후보 경선의 막을 열었다. 김근태 김중권 노무현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7인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인제 대세론이 다른 사람들을 들러리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3월 16일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깜짝쇼처럼 돌출했다. 노무현 시대의 서막이었다. 반대편에선 이인제 대세론보다 강력한 이회창 대통령론이 비등했지만 결국 노무현 신풍(新風)이 이회창 재수풍(再修風)을 삼켜버렸다.
지금 민주당의 중심세력은 2007년 12월 19일 이명박 압승에 패주한 친노(親盧)폐족이다. 하지만 이들이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 부활하기까지는 2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야권은 작년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권을 탈환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로부터 5개월 반, 총선 민심은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의 거야(巨野) 견제론에 쏠렸다. 박원순 득세에서 한명숙 퇴진까지의 야권 부침(浮沈)에 반년도 안 걸렸다.
외설과 저주의 김용민 막말이 투표 8일 전에 불거져 결국 유권자 선택의 마지막 재료가 됐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어떤 전문가의 선거 예측보다도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 며칠 사이 ‘정신적 집권세력’ 민주당이 보여준 것은 도덕성도 위기관리능력도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이 무능하며 부도덕하다고 심판하기엔 민주당의 김용민 대응이 과거 노무현 정부의 독선과 실정(失政)을 먼저 떠오르게 했다.
새누리당은 작년 12월 19일 비상대책위 체제를 공식가동한 지 4개월 만에 자신들부터 놀랄 성적을 거두었다. 위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리는 “총선을 이기는 쪽이 대선을 이길 확률이 크다.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서로 다르면 국가 운영 자체가 어렵고 대통령 리더십이 약해진다는 걸 우리 국민도 이젠 충분히 안다”고 풀이했다. 새누리당의 승리를 점쳤더라도 그렇게 말했을까.
총선 결과를 놓고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민심이 쇄신을 긍정적으로 봤다는 신호’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야권이 방심하지 않고 낮은 자세를 지키며 이정희 경선 여론조작, 김용민 망언 등에 정도(正道)로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어땠을까. 새누리당은 상대 실책의 반사이익을 보았다. 표심에는 또 지지자들의 고뇌와 갈등이 배어있을 것이다.
바둑을 두는 상수(上手)보다 관전하는 하수(下手)의 눈이 더 밝은 경우가 많다. 누구나 구경꾼일 때는 냉철할 수 있으나 당사자가 되면 상황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정치도 직접 뛰는 사람은 무언가에 홀리고 정신이 흐려지기 쉽다.
박근혜, 심판대에 먼저 올랐다
오만과 독선과 아집은 ‘패망의 보증수표’라는 것이 동서고금의 경험칙인데도 일단 득세하거나 인기를 얻으면 알게 모르게 변한다. 권력에 취해 총기가 흐려지고 ‘당신은 다릅니다!’라는 속삭임에 눈과 귀가 먼다.
이제는 새누리당이 정신적으로 정권을 재창출한 느낌일 수 있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새누리당이 심판대에 올랐음을 뜻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위험한 쪽은 야권이 아니라 새누리당이다. 불과 4, 5개월 전 득세한 민주당의 총선 실패는 역으로 12월 19일 대선까지 8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려준다. 민심은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사설] 人權 팔던 진보, 이자스민씨 향한 돌팔매 그냥 보고 있나
입력 : 2012.04.17 23:04 | 수정 : 2012.04.17 23:13
4·11 총선 후, 필리핀 출신으로 결혼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새누리당 비례대표 이자스민씨(氏)를 헐뜯는 험담이 인터넷과 SNS에 흘러다녔다. "불법 체류자가 판치게 생겼다" "매매혼 가정을 위해 뼈 빠지게 벌어 낸 우리 세금이 거덜난다"는 상식 이하의 저질 비난과 이씨가 '이주민 천국을 약속했다'는 식의 날조된 중상모략이 나돌았다. 독버섯 같은 누리꾼들이 익명(匿名)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뱉어내는 더러운 말들은 그들의 입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공기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이자스민씨는 14년 전 한국으로 시집와 두 아이를 낳은 후 남편과 사별하고도 이주 여성을 돕는 모임의 사무총장을 지내며 꿋꿋하게 살아온 모범적 시민이다. 한국에는 이씨 같은 결혼 이주민이 20만명을 넘어섰다.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도 15만명에 이른다. 그들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수천명이 지금 이 순간 군에 복무하며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 인터넷과 SNS의 귀퉁이에 숨어 이런 모범 시민들 등에 저주의 칼을 꽂는 비겁한 누리꾼들 가운데 병역의 의무를 다한 인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 간 김창준씨가 미국 하원의원이 되고 김용씨가 세계은행 총재가 된 걸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못난 인간들은 '한국의 김창준'이나 '한국의 김용'이란 목표를 품고 이 땅에 건너와 우리 시민이 된 이주민들을 향해 돌팔매를 서슴지 않는다.
세계 어디서나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주민 권리 보호에 앞장선다. 그게 진보의 윤리다. 그러나 우리 정치의 진보는 이런 진보의 세계 표준과는 거리가 멀다. 이자스민씨에게 더러운 돌팔매가 날아오는데도 진보적 인사가 나서 몸으로 돌팔매를 막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일부 인사가 트윗에 이씨 비난을 자제해달라는 개인 글을 올렸을 뿐 지금까지 당 차원에선 논평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일부 야당 지지자들은 못난 인간들의 못난 짓에 가세하고 있는 판이다. 야당 성향 진중권씨가 "이자스민에게 악담하는 찌질이들 정리하지 않으면 대선도 희망 없다"고 걱정할 지경이다.
민주통합당 강령은 '이주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고 하고, 진보당 강령은 "이민 다문화 사회를 향한 전환과 국적 및 문화에 대한 선택권을 존중하고 모든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두 당은 이씨가 새누리당 소속이어서 예외(例外)라고 여기는 걸까.
동아일보
4·11 총선 후, 필리핀 출신으로 결혼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새누리당 비례대표 이자스민씨(氏)를 헐뜯는 험담이 인터넷과 SNS에 흘러다녔다. "불법 체류자가 판치게 생겼다" "매매혼 가정을 위해 뼈 빠지게 벌어 낸 우리 세금이 거덜난다"는 상식 이하의 저질 비난과 이씨가 '이주민 천국을 약속했다'는 식의 날조된 중상모략이 나돌았다. 독버섯 같은 누리꾼들이 익명(匿名)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뱉어내는 더러운 말들은 그들의 입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공기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이자스민씨는 14년 전 한국으로 시집와 두 아이를 낳은 후 남편과 사별하고도 이주 여성을 돕는 모임의 사무총장을 지내며 꿋꿋하게 살아온 모범적 시민이다. 한국에는 이씨 같은 결혼 이주민이 20만명을 넘어섰다.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도 15만명에 이른다. 그들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수천명이 지금 이 순간 군에 복무하며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 인터넷과 SNS의 귀퉁이에 숨어 이런 모범 시민들 등에 저주의 칼을 꽂는 비겁한 누리꾼들 가운데 병역의 의무를 다한 인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 간 김창준씨가 미국 하원의원이 되고 김용씨가 세계은행 총재가 된 걸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못난 인간들은 '한국의 김창준'이나 '한국의 김용'이란 목표를 품고 이 땅에 건너와 우리 시민이 된 이주민들을 향해 돌팔매를 서슴지 않는다.
세계 어디서나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주민 권리 보호에 앞장선다. 그게 진보의 윤리다. 그러나 우리 정치의 진보는 이런 진보의 세계 표준과는 거리가 멀다. 이자스민씨에게 더러운 돌팔매가 날아오는데도 진보적 인사가 나서 몸으로 돌팔매를 막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일부 인사가 트윗에 이씨 비난을 자제해달라는 개인 글을 올렸을 뿐 지금까지 당 차원에선 논평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일부 야당 지지자들은 못난 인간들의 못난 짓에 가세하고 있는 판이다. 야당 성향 진중권씨가 "이자스민에게 악담하는 찌질이들 정리하지 않으면 대선도 희망 없다"고 걱정할 지경이다.
민주통합당 강령은 '이주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고 하고, 진보당 강령은 "이민 다문화 사회를 향한 전환과 국적 및 문화에 대한 선택권을 존중하고 모든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두 당은 이씨가 새누리당 소속이어서 예외(例外)라고 여기는 걸까.
동아일보
“없어진 줄 알았던 민혁당, 민노당 이어 통진당까지 장악”
■ 학생운동 출신 전문가들 주장 잇따라
“경기동부연합은 ‘빈 껍데기’입니다. 보수우파 측에서 껍데기를 몸통이라고 비판하니 저들도 웃는 겁니다. 몸통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잔존 세력들입니다.”(허현준 남북청년행동 사무처장·과거 민혁당 관련 활동)
통진당의 당권을 차지한 세력은 ‘경기동부연합’이 아닌 민혁당 잔존 세력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민혁당은 북한에서 직접 지령을 받은 종북(從北) 지하당으로 1999년 실체가 드러나 수뇌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됐다. 하지만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을 재건해 점조직 형태로 유지해 왔으며, 이 세력들이 과거 민주노동당을 거쳐 현재 통진당의 당권을 접수했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통진당 간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당내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 민혁당 관련자가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
민혁당 사건의 법원 판결에서 드러난 통진당 내 민혁당 관련자는 국회의원 당선자 2명, 야권 단일 후보자 1명 그리고 핵심 당직자 2명 등이다.
통진당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자는 민혁당 사건으로 200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수뇌부가 체포됐지만, 이 당선자는 약 3년간 도망다니다 체포됐다. 민혁당을 세운 서울대 법대 출신 김영환 씨가 북한 체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민혁당 해산과 함께 전향을 선택한 것과 대비된다. 이 당선자는 서울고법 판결 후 5개월 만인 그해 8월 노무현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됐다.
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이 당선자의 주요 혐의는 ‘반국가단체 구성’이다. 이 당선자는 민혁당 창당에 참여해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혁명을 통한 국가 변란을 목표로 삼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 또 한국외국어대 용인분교 후배들을 민혁당에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했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를 대신해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상규 당선자도 1992년 민혁당 창당 당시 참여해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이끌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울산 북구에 출마한 김창현 후보는 1999년 울산 동구청장 재직 당시 드러난 반국가단체인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영남위원회는 민혁당 산하 조직이었다. 같은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던 박경순 씨는 현재 통진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통진당 내 대표적 기획통으로 꼽히며 이번 선거에서 공동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이의엽 전략기획위원장 역시 민혁당 사건(반국가단체 구성 등 혐의)으로 2000년 검거돼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경기동부연합 활용해 ‘신분 세탁’
민혁당 산하 전북위원회에서 하부 조직원 역할을 했던 허현준 사무처장은 “경기동부연합은 민혁당 사건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거쳐간 중간 단계”라고 주장했다.
경기동부연합은 1991년 결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하위 지역 조직. 전국연합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27개 단체가 모여 만든 좌파 성향의 연합체였다. 2006년 한국진보연대가 출범하면서 활동을 멈췄고, 2008년 공식 해산했다. 경기동부연합도 이때 함께 사라졌다. 따라서 현재 통진당 당권을 차지한 계파가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는 것. 실체가 없었던 경기동부연합 대신 점조직으로 운영한 민혁당 잔존 세력이 핵심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민노당 장악 후 통진당까지
지하조직인 민혁당 관련자들이 통진당과 같은 공당의 핵심이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활동 노선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지적된다. 운동권 내 다른 계파(PD계·민중민주계열)가 세운 민주노동당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이들 역시 합법적 정당 조직을 통한 목표 달성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운동권 세력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들이 2001∼2003년에 걸쳐 치밀하게 민노당을 접수했고, 이를 발판으로 통진당도 장악했다”고 설명했다.
민혁당 관련자들은 민노당 하부 조직부터 장악해 나갔다. 학생운동을 했던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수십 명의 조직원이 서울 용산 등 민노당 특정 지역위원회에 주민등록을 옮겨 대의원 수를 늘린 뒤, 위원장을 자기 세력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민혁당 세력이 민노당 내 주류로 떠올랐다.
2006년 민노당 핵심 당직자가 당원 명부를 북한에 넘긴 ‘일심회’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노당 내 이념 갈등이 깊어졌다. 2008년 당내 종북 세력 척결을 주장한 심상정, 노회찬 등이 당을 떠나면서 민노당은 소위 ‘종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한 대표는 “이미 ‘종북화’된 민노당은 올해 총선을 앞두고 야권통합을 명분으로 통진당 결성을 주도해 결국 당권도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 민혁당 사건은 ▼
1998년 12월 18일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半)잠수정 한 척을 우리 해군이 격침했다. 이때 수거한 유류품을 국가정보원이 수사한 결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 수뇌부 대부분이 검거됐다.
이 잠수정에는 민혁당 관련 인사들과 만난 북한 간첩이 타고 있었으며 그가 기록한 문건들이 민혁당의 존재와 조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혁당은 1992년 만들어졌으며 서울대 법대생 김영환 씨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김 씨는 이른바 ‘강철서신’을 통해 학생운동권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퍼뜨린 인물로, 1991년 비밀리에 방북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 하지만 방북 기간에 북한의 경직된 사회상을 목격했고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를 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김 씨는 1997년 결국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 씨의 전향에 반발한 세력들이 민혁당을 재건해 활동했다.
김기용 채널A 기자 kky@donga.com
北 지침 따르는 인사가 南국회의원 돼서 법안을 만든다?
“경기동부연합은 ‘빈 껍데기’입니다. 보수우파 측에서 껍데기를 몸통이라고 비판하니 저들도 웃는 겁니다. 몸통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잔존 세력들입니다.”(허현준 남북청년행동 사무처장·과거 민혁당 관련 활동)
통진당의 당권을 차지한 세력은 ‘경기동부연합’이 아닌 민혁당 잔존 세력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민혁당은 북한에서 직접 지령을 받은 종북(從北) 지하당으로 1999년 실체가 드러나 수뇌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됐다. 하지만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을 재건해 점조직 형태로 유지해 왔으며, 이 세력들이 과거 민주노동당을 거쳐 현재 통진당의 당권을 접수했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통진당 간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당내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 민혁당 관련자가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
민혁당 사건의 법원 판결에서 드러난 통진당 내 민혁당 관련자는 국회의원 당선자 2명, 야권 단일 후보자 1명 그리고 핵심 당직자 2명 등이다.
통진당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자는 민혁당 사건으로 200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수뇌부가 체포됐지만, 이 당선자는 약 3년간 도망다니다 체포됐다. 민혁당을 세운 서울대 법대 출신 김영환 씨가 북한 체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민혁당 해산과 함께 전향을 선택한 것과 대비된다. 이 당선자는 서울고법 판결 후 5개월 만인 그해 8월 노무현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됐다.
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이 당선자의 주요 혐의는 ‘반국가단체 구성’이다. 이 당선자는 민혁당 창당에 참여해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혁명을 통한 국가 변란을 목표로 삼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 또 한국외국어대 용인분교 후배들을 민혁당에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했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를 대신해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상규 당선자도 1992년 민혁당 창당 당시 참여해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이끌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울산 북구에 출마한 김창현 후보는 1999년 울산 동구청장 재직 당시 드러난 반국가단체인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영남위원회는 민혁당 산하 조직이었다. 같은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던 박경순 씨는 현재 통진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통진당 내 대표적 기획통으로 꼽히며 이번 선거에서 공동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이의엽 전략기획위원장 역시 민혁당 사건(반국가단체 구성 등 혐의)으로 2000년 검거돼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경기동부연합 활용해 ‘신분 세탁’
민혁당 산하 전북위원회에서 하부 조직원 역할을 했던 허현준 사무처장은 “경기동부연합은 민혁당 사건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거쳐간 중간 단계”라고 주장했다.
경기동부연합은 1991년 결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하위 지역 조직. 전국연합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27개 단체가 모여 만든 좌파 성향의 연합체였다. 2006년 한국진보연대가 출범하면서 활동을 멈췄고, 2008년 공식 해산했다. 경기동부연합도 이때 함께 사라졌다. 따라서 현재 통진당 당권을 차지한 계파가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는 것. 실체가 없었던 경기동부연합 대신 점조직으로 운영한 민혁당 잔존 세력이 핵심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민노당 장악 후 통진당까지
지하조직인 민혁당 관련자들이 통진당과 같은 공당의 핵심이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활동 노선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지적된다. 운동권 내 다른 계파(PD계·민중민주계열)가 세운 민주노동당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이들 역시 합법적 정당 조직을 통한 목표 달성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운동권 세력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들이 2001∼2003년에 걸쳐 치밀하게 민노당을 접수했고, 이를 발판으로 통진당도 장악했다”고 설명했다.
민혁당 관련자들은 민노당 하부 조직부터 장악해 나갔다. 학생운동을 했던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수십 명의 조직원이 서울 용산 등 민노당 특정 지역위원회에 주민등록을 옮겨 대의원 수를 늘린 뒤, 위원장을 자기 세력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민혁당 세력이 민노당 내 주류로 떠올랐다.
2006년 민노당 핵심 당직자가 당원 명부를 북한에 넘긴 ‘일심회’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노당 내 이념 갈등이 깊어졌다. 2008년 당내 종북 세력 척결을 주장한 심상정, 노회찬 등이 당을 떠나면서 민노당은 소위 ‘종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한 대표는 “이미 ‘종북화’된 민노당은 올해 총선을 앞두고 야권통합을 명분으로 통진당 결성을 주도해 결국 당권도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 민혁당 사건은 ▼
1998년 12월 18일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半)잠수정 한 척을 우리 해군이 격침했다. 이때 수거한 유류품을 국가정보원이 수사한 결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 수뇌부 대부분이 검거됐다.
이 잠수정에는 민혁당 관련 인사들과 만난 북한 간첩이 타고 있었으며 그가 기록한 문건들이 민혁당의 존재와 조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혁당은 1992년 만들어졌으며 서울대 법대생 김영환 씨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김 씨는 이른바 ‘강철서신’을 통해 학생운동권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퍼뜨린 인물로, 1991년 비밀리에 방북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 하지만 방북 기간에 북한의 경직된 사회상을 목격했고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를 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김 씨는 1997년 결국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 씨의 전향에 반발한 세력들이 민혁당을 재건해 활동했다.
김기용 채널A 기자 kky@donga.com
北 지침 따르는 인사가 南국회의원 돼서 법안을 만든다?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통합진보당, 유독 北로켓 감싸는 이유는
기사입력 2012-04-17 03:00:00 기사수정 2012-04-17 07:40:30
北 남파공작원 출신 김동식
“北 ‘주체-세습-인권 등 5가지 비판 말라’ 南지하당에 지령”
국회의원은 헌법기관 北연계 의혹 털어내야
■ 北 남파공작원 출신 김 동 식 씨 인터뷰
[의학] 당뇨완치 이것만알면해결!
발기부전?漢方으로 한방에 해결!!
《 통합진보당 일부 의원 당선자들의 과거 ‘주체사상파 행적’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보수우파 인사들은 “이들이 19대 국회에서 북한과의 직간접적인 연계하에 상임위 활동 등으로 얻은 정보를 북한 측에 유출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이에 진보좌파 쪽에선 ‘해묵은 색깔론 제기’라고 반발한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좌파정당의 일반 구성원과 국회의원은 명백히 다르다. 먼저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이들은 각자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한 명의 국회의원은 보좌진 월급까지 매년 5억 원 정도의 국민세금을 쓴다. 최고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도 있다. 적어도 국회의원에 대해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남파 공작원 김동식 씨 인터뷰는 이런 맥락에서 추진됐다. 》
“북한의 광명성 3호 미사일(로켓) 발사 때 왜 유독 통합진보당만 북한을 감싸는 논평을 냈다고 생각하세요?”
북한 조선노동당 소속 대남 공작원이었던 김동식 씨(47)는 16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렇게 되물었다.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 대남공작과 소속이었던 그는 1990년과 1995년 두 번 남파됐으며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붙잡힌 뒤 남한에 정착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때부터 통진당의 궤적을 보면 지도부 중 일부가 북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면서 “그런 게 아니라면 통진당 인사들이 북한 문제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보] 北, 장거리 로켓 ‘광명성 3...
―북한의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1990년대 초 남한 내 지하세력으로부터 ‘동유럽이 무너지고 북한 국력은 약해지면서 북한에 대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데 무작정 버티기가 난감하다. 어느 정도까지 북한 비판에 동참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이 전달돼 왔다. 당시 북한 노동당은 내부 토론 끝에 ‘북한의 경제난을 포함해 일반적인 것은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부자세습, 주체사상, 정치체제, 북한 인권, 북한 지도자 등 5가지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지령(가이드라인)을 내려보냈다. 통진당을 보면 김정은 3대 세습 문제나 탈북자 북송 등 북한 인권에 대한 지적이 없다.”
그는 이어 통진당의 핵심 멤버인 ‘민혁당’ 출신 인사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혁당은 1992년 결성된 지하당. 통진당 비례대표 당선자인 이석기 씨, 이의엽 현 통진당 정책위의장, 19대 총선에 울산 북구에 출마한 김창현 전 구청장 등이 민혁당 출신으로 알려졌다.
―대남공작과 소속이었다는데….
“대남공작과는 남파공작원이 포섭해 온 남한 내 지하 세력을 관리하고 보고받고 지령을 내리는 일을 한다. 1991년 북한에 올라와 김일성을 만나고 1992년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를 포섭한 사람이 윤택림이다. 그는 내가 근무할 당시 대남공작과 과장이었다. 과장이면 우리나라 부처 국실장 급으로 보면 된다.”
―북한의 대남공작 전략은 무엇인가.
“북한에선 1990년대 초반 지하조직은 유지하되 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대중혁신 정당을 만드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폭동, 쿠데타, 전쟁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한 번에 정권을 바꾸는 일이 힘들어지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해 서서히 정권을 뒤집자는 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렇게 만든 대중혁신 정당은 무엇인가.
“민중당이다. 민중당 핵심 인사 몇 명을 통해 지령을 내렸다. 1991년 가을 대남공작과 1개 팀이 담당했다. 돈도 내려보냈다. 사회문화부 안에 민중당을 전담하는 혁신정당지도과도 새로 만들었다. 내가 1차 남파됐을 때 포섭했던 사람도 민중당의 주요 당직자였다. 그러나 민중당이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서 해산됐고 혁신정당지도과도 없어졌다.”
―북한이 정당을 포섭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적은 단 하나다.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거다. 한 번에 혁명하기는 힘들어진 거 아니냐. 북한 표현대로라면 혁명세력을 보전, 보호, 축적, 확대하는 게 일단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대남공작과에서 남파한 공작원이 몇 명이나 되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 개의 팀이 남한을 다녀갔다. 1개 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2명이 1개 팀이니까 20명 정도가 다녀갔고 남한에서 붙잡힌 경우는 없었다.”
―남한에 두 번 내려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번 모두 남한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는 3명을 접촉해 2명을 포섭했고, 두 번째 왔을 때는 7명을 접촉했으나 한 명도 포섭에 성공하지 못했다.”
―포섭을 할 때 어떻게 접촉하나.
“북한에서 내려올 때 포섭 대상을 정해서 내려온다. 주로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주축 세력들이다. ‘북한에서 내려왔다’고 처음부터 터놓고 말한다. 포섭은 철저히 이념과 사상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돈으로 매수하지는 않는다. 노동당에 가입한 뒤 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연락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포섭이라고 칭한다.”
―두 번 다 제주도로 침투했는데….
“제주도는 경비가 취약해 침투하기에 손쉬운 루트다. 북한이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도 중요한 침투 루트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는 북한에서 김일성도 만났다. 그 외에 북한을 다녀간 남한 지하세력이 있었나.
“1990년대 초에만 김영환 외에도 두세 차례 남한 인사들이 비공개로 북한을 다녀간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일성을 만날 정도면 김영환은 남한에서 포섭한 인물 중 최고위급이라고 보면 된다. 1995년 김영환이 기고를 통해 북한체제를 비판했을 때 사회문화부 부부장이 굉장히 화를 내며 ‘변절한 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통진당 종북 노선의 뿌리
기사입력 2012-04-10 03:00:00 기사수정 2012-04-10 04:39:40
이형삼 논설위원
“주사파가 깊이 침투해 있다. 주사파는 북의 지령에 의해 움직인다. 학생운동 리더 대부분은 주사파이며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이들도 있다.” 1994년 7월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배후’ 발언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운동권은 “근거를 대라”고 추궁했지만 박 총장은 운동권 출신들이 신부(神父)인 자신에게 고해성사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었다.
당시 한총련 간부는 진위를 묻는 필자에게 “우리는 칸트 철학이든 주체사상이든 고금의 다양한 사상을 학술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주적’ 조직이다. 무슨 배후의 지령에 따라 줏대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공안당국자는 “북한과 ‘단선연계(單線連繫) 복선포치(複線布置)’된 것”이라며 정색했다. 상위 조직원이 여러 하위 조직원을 두되 상-하 조직원만 일대일로 접촉하고 하위 조직원끼리는 서로 알 수 없게 차단하는 지하조직 규율. 그래서 북과 연결된 상위 조직원 외엔 조직의 실체를 모른다는 의미였다.
‘시뻘건 핏빛 낙동강을 등지고 눈물을 곱씹으며 돌아간 조국해방전사들의 투혼이 우리의 심장에 강물 되어 굽이친다.’ 1994년 2기 한총련 출범식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얼마 후 김일성이 죽자 그를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한 조국을 수호한 영장,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킨 지도자’로 떠받든 유인물이 배포됐다. 5년 전에 동유럽 공산권 붕괴를 지켜봤던 많은 학생은 NL(민족해방)계 주사파의 친북 행각에 실망해 돌아섰다.
주사파 내부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운동권에서 활동한 한 이론가는 “주체사상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강조하는데, 수령론과 후계자론까지 체화한 교조적 북한 추종은 운동가의 자발적 창조적 사고능력을 저해한다”며 핵심을 짚었다.
필자가 18년 전의 취재수첩을 뒤적인 건 빛바랜 ‘NL 주사파’의 재등장 때문이다. 19대 국회 원내교섭단체를 노리는 통합진보당(통진당)의 주류가 1980년대 운동권의 NL계 경기동부연합 인맥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낳았다. 당 지도부와 총선 후보 중 주사파 민혁당 등 북한의 지하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전향하지 않은 사람이 여럿이라는 폭로가 뒤따랐다.
노수희 범민련 부의장은 통진당과 민주통합당의 야권연대 성사를 지원한 뒤 평양으로 날아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쓴 조화를 바쳤다. 지난 주말 범민련은 “4·11총선에서 정당투표는 통진당으로 몰아주자”는 성명을 냈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경기동부연합의 실체를 모른다고 했고 조국 서울대 교수는 경기동부연합이 ‘NL 비(非)주사파’였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 출신을 비롯한 NL계는 통진당 전신인 민노당의 당권파였고 이들의 노골적 종북(從北) 노선이 내부 갈등을 촉발해 2008년 노회찬 심상정 씨 등의 탈당 사태가 불거졌다. 민노당 당직자들이 간첩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통진당은 북한의 6·25 남침을 인정하지 않고 북의 3대 세습과 탈북자 북송에 침묵하지만 종북 의혹을 제기하면 ‘색깔론’이라고 역공한다. ‘단선연계 복선포치’된 탓에 배후의 실체에 눈 감고 귀 막은 걸까. 역설적으로 민간인 불법 사찰과 김용민 막말 파문이 종북세력을 살렸다. 그들에게 집중되던 조명이 청와대와 ‘나꼼수’로 옮겨갔다. 모처럼 찾아온 종북 공개 검증의 기회가 사라졌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이형삼 논설위원
“주사파가 깊이 침투해 있다. 주사파는 북의 지령에 의해 움직인다. 학생운동 리더 대부분은 주사파이며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이들도 있다.” 1994년 7월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배후’ 발언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운동권은 “근거를 대라”고 추궁했지만 박 총장은 운동권 출신들이 신부(神父)인 자신에게 고해성사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었다.
당시 한총련 간부는 진위를 묻는 필자에게 “우리는 칸트 철학이든 주체사상이든 고금의 다양한 사상을 학술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주적’ 조직이다. 무슨 배후의 지령에 따라 줏대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공안당국자는 “북한과 ‘단선연계(單線連繫) 복선포치(複線布置)’된 것”이라며 정색했다. 상위 조직원이 여러 하위 조직원을 두되 상-하 조직원만 일대일로 접촉하고 하위 조직원끼리는 서로 알 수 없게 차단하는 지하조직 규율. 그래서 북과 연결된 상위 조직원 외엔 조직의 실체를 모른다는 의미였다.
‘시뻘건 핏빛 낙동강을 등지고 눈물을 곱씹으며 돌아간 조국해방전사들의 투혼이 우리의 심장에 강물 되어 굽이친다.’ 1994년 2기 한총련 출범식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얼마 후 김일성이 죽자 그를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한 조국을 수호한 영장,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킨 지도자’로 떠받든 유인물이 배포됐다. 5년 전에 동유럽 공산권 붕괴를 지켜봤던 많은 학생은 NL(민족해방)계 주사파의 친북 행각에 실망해 돌아섰다.
주사파 내부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운동권에서 활동한 한 이론가는 “주체사상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강조하는데, 수령론과 후계자론까지 체화한 교조적 북한 추종은 운동가의 자발적 창조적 사고능력을 저해한다”며 핵심을 짚었다.
필자가 18년 전의 취재수첩을 뒤적인 건 빛바랜 ‘NL 주사파’의 재등장 때문이다. 19대 국회 원내교섭단체를 노리는 통합진보당(통진당)의 주류가 1980년대 운동권의 NL계 경기동부연합 인맥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낳았다. 당 지도부와 총선 후보 중 주사파 민혁당 등 북한의 지하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전향하지 않은 사람이 여럿이라는 폭로가 뒤따랐다.
노수희 범민련 부의장은 통진당과 민주통합당의 야권연대 성사를 지원한 뒤 평양으로 날아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쓴 조화를 바쳤다. 지난 주말 범민련은 “4·11총선에서 정당투표는 통진당으로 몰아주자”는 성명을 냈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경기동부연합의 실체를 모른다고 했고 조국 서울대 교수는 경기동부연합이 ‘NL 비(非)주사파’였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 출신을 비롯한 NL계는 통진당 전신인 민노당의 당권파였고 이들의 노골적 종북(從北) 노선이 내부 갈등을 촉발해 2008년 노회찬 심상정 씨 등의 탈당 사태가 불거졌다. 민노당 당직자들이 간첩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통진당은 북한의 6·25 남침을 인정하지 않고 북의 3대 세습과 탈북자 북송에 침묵하지만 종북 의혹을 제기하면 ‘색깔론’이라고 역공한다. ‘단선연계 복선포치’된 탓에 배후의 실체에 눈 감고 귀 막은 걸까. 역설적으로 민간인 불법 사찰과 김용민 막말 파문이 종북세력을 살렸다. 그들에게 집중되던 조명이 청와대와 ‘나꼼수’로 옮겨갔다. 모처럼 찾아온 종북 공개 검증의 기회가 사라졌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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